설교 제목: 어거스틴 설교 제4번
에서와 야곱
날짜: 주후 420년 이전
본문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서론
1. 어제의 성경 봉독으로 인해 제가 여러분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할 의무가 있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주의를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분히 물질주의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영적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물질주의적 이해)은 사망이요"(롬 8:6).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을 받은 우리 중 누구도 일시적인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고, 대신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창조주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우리의 눈이 흔들리지 않게 합시다. 오직 믿음 안에서, 지금 여기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고전 2:9) 것에 도달하기까지 진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읍시다. 이것은 보이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야 그것이 실제로 임했을 때 믿었던 우리가 당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걸으며,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바라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으며, 아직 품지 못한 것을 사랑하며 나아갑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야말로 장차 올 것을 붙잡기에 합당하게 만듭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용기는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여전히 물질주의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있었을 때, 그는 여종의 질문에 당황하여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의사(주님)는 병자(베드로)에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병자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할 정도로 병들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도 자신의 건강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문제의 진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을 위해 죽겠노라고 말했지만, 아직 병이 들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이 오셔서 임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을 때, 베드로는 영적인 확신으로 충만해졌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이전에 부인했던 그분을 위해 진정으로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순교자를 충만하게 했던 종류의 확신입니다. 그들은 거짓된 신념이나 헛된 환상, 빈 소망이나 불확실성을 위해 죽고 고난받은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굳게 붙잡고 '진리'가 하신 약속을 위해, 즉 약속하신 분이 그것을 지킬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보증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현재가 된 후에는 결코 과거로 사라지지 않을 미래의 것들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모든 현재의 실체들을 멸시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3. 그러므로 어제 이 자리에 계셨던 분들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동생이 형보다 우선시되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반드시 야곱에게 속하고 에서를 사랑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물질주의적으로 살기를 원하거나 장차 올 세대에서 물질주의적인 쾌락을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에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주의적으로 살며 그런 것들에서 기쁨을 찾고, 심지어 악한 사람들도 누리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받기를 바라며, 악인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에 자신의 모든 행복을 두는 사람들, 혹은 현재의 이런 행복을 멸시하더라도 미래에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 모두 물질주의자입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시간 너머의 것에 도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현재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타락이나 쾌락과 흥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며, 음행과 술 취함과 육신적인 향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며, 소유에 대한 자부심과 세상 권력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사들이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4. 천사들은 피조물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즐거워하며 삽니다. 피조물을 즐거워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안에 있으나, 창조주를 즐거워하는 것은 몸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정결해진 마음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것 안에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무엇을 보기에 복이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형제 여러분, 천사들의 기쁨이 땅이나 하늘, 혹은 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데서 솟아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기쁨은 하늘과 땅을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을 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십니다
5.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에 관해 말하자면, 그분은 하늘도 땅도 아니며, 지상의 어떤 것이나 천상의 어떤 것으로도 생각될 수 없습니다. 육체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으로도 그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어떤 크고 아름다운 인물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장소에 포함되지 않으며, 공간에 의해 제한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 금을 만드셨으며, 땅 위에 있는 그것은 보잘것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하늘에서 보는 태양이나 달, 별들, 혹은 하늘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어떤 것과 하나님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태양이 경계 없는 빛의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바퀴처럼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태양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에게 "하나님은 무한하고 경계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며 태양을 이리저리 늘려서 한계가 없게 만들고 상하좌우로 끝없이 펼쳐서 이 경계 없는 빛이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16) 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빛은 회전하지 않으며, 여러분의 머리에 달린 눈으로 지각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하나님은 참된 빛이십니다
6. 그러나 여러분이 진리가 무엇인지, 지혜와 공의가 무엇인지 볼 수 있다면, 어떻게 "그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라"(시 34:5) 고 말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라고 말한 그 빛이 어떻게 참된 빛인지, 그리고 세례 요한이 어떻게 참된 빛이 아니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8) 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빛이 아니었던 것은 세례 요한뿐만이 아닙니다. 바울도 참된 빛이 아니었고, 베드로도 참된 빛이 아니었으며, 그 어떤 사도도 참된 빛이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분만이 참된 빛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빛을 받았기에 '빛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머리에 있는 눈도 빛(lights)이라고 불리며, 누구나 "내 눈(my lights)을 걸고 맹세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 빛들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태양도 없고 달도 없으며 등불도 없다면, 그것들은 분명 어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어떤 면에서 빛입니까? 그것들이 빛이라면 앞을 보게 하고 발을 인도하게 하십시오. 그런데도 그것들은 빛입니다. 왜 빛입니까? 빛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빛이 비칠 때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이마도, 귀도, 콧구멍도, 손도, 발도 아닙니다. 오직 눈이라고 불리는 그 기관들만이 빛이 비쳤음을 지각합니다. 빛이 없으면 그것들은 어두워지지만, 빛이 들어오면 오직 그것들만이 밝아집니다. 그것들만이 빛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다른 부분들도 조명을 받지만, 그것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솟아오르거나 들어온 빛은 온 몸에 퍼집니다. 눈에는 볼 수 있도록, 나머지 몸에는 보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성도는 보기 위해서, 그리고 본 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빛이긴 하지만 '참된 빛'은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각 사람을 비추는 분만이 참된 빛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분이 이 태양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면 각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태양은 남녀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보고, 아주 작은 동물들도 보기 때문입니다. 파리조차 이 태양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 빛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라고 기록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정의와 다른 덕목의 빛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7. 형제 여러분, 진리의 빛과 지혜의 빛,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어디에나 존재하는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정의의 빛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그것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의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정의를 저버립니다. 그렇다고 정의가 줄어듭니까? 그들이 정의로 돌아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정의가 늘어납니까? 그들이 그것을 저버려도 그것은 온전한 채로 남아 있고, 그들이 돌아와도 그것은 온전한 채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의 빛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갑니까? 아니면 그것이 떠오르는 다른 장소와 도달하는 다른 장소가 따로 있습니까?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습니까? 만약 서쪽에 있는 사람이 공의롭게, 즉 정의를 따라 살고자 한다면, 이 정의를 따라 살기 위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부족합니까? 또한 동쪽에 위치한 누군가가 똑같은 정의를 따라 공의롭게 살고자 한다면, 그에게 정의가 부족합니까? 결국 정의는 거기에도 있습니다. 공의롭게 사는 누구에게나 곁에 있습니다. 그 규칙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공의롭게 살아야 할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의를 볼 때 공의롭게 살고, 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에 일치시키기 위해 정의를 봅니다. 정의의 규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하지 않으면 불의라는 잘못된 길로 밀려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동쪽에 있는 이 사람 곁에도 있을 수 있기에, 어디에도 없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나 있습니다. 지혜도 그러하고, 진리도 그러하며, 순결함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빛을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시력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보기 위해서 마음이 정결해지게 하십시오. 그러나 정결해지고 보기 위해서, 정결해질 자격을 얻도록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니 결국 여러분이 치유되어 볼 수 있을 때까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일을 미루어 두십시오.
미래의 삶은 영적인 것입니다
8. 이제 장차 올 세대의 삶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상상하고 그런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뜻이며, 세상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이런 것들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어떤 종류의 빛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즐거워하는 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는 것'은 그 빛에서 이슬처럼 추출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이슬로부터 복을 받는다면, 땅의 신실함으로부터 풍성함을 얻는 것입니다(창 27:28). 이것이 야곱이 복을 받은 방식입니다. 우리도 물질주의적인 방식으로 살지 말고 그(야곱)에게 속합시다. 모든 사람이 물질주의적으로 살기 시작하기 때문에 에서가 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에 대해 듣습니다. 옛 언약은 일시적인 약속들을 담고 있었으나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으로 주의 깊게 들어주십시오. 만약 약속의 땅이 유대인들에게 약속되었다면, 그 약속의 땅은 영적인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만약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되었다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 자체가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에게 육체의 물질적인 할례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영적인 할례를 의미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7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저녁이 없는 영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 7일 동안 매일매일 "저녁이 되며"(창 1:5) 라고 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에 대해서는 "저녁이 되며"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없는 일곱째 날은 어떤 일몰도 끝낼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상징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에게 물질적인 제사가 주어졌다면, 그 짐승 제물들은 모두 영적인 제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이 그 현재 순간에 매우 중요하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미래의 의미를 찾지 않았던 모든 사람, 즉 물질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없었던 모든 사람은 큰아들에게 속하며 옛 언약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옛 언약 — 새 언약의 형상
9. 옛 언약은 모형과 상징 안의 약속이며, 새 언약은 영적으로 이해된 약속입니다. 따라서 지상에 있었던 예루살렘은 옛 언약에 속하지만, 하늘에 있으며 새 언약에 속하는 예루살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의 물질적인 할례는 옛 언약에 속하고, 마음의 할례는 새 언약에 속합니다. 옛 언약에 따르면 백성은 애굽에서 해방되지만, 새 언약에 따르면 백성은 마귀에게서 해방됩니다. 애굽의 박해자들과 바로는 애굽을 탈출하는 유대인들을 뒤쫓습니다. 그리스도인 백성은 자기 자신의 죄들과 죄들의 우두머리인 마귀에 의해 쫓깁니다. 애굽인들이 바다까지 유대인들을 뒤쫓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기까지 자신들의 죄에 의해 쫓깁니다. 형제 여러분, 관찰하고 보십시오. 바다를 통해 유대인들은 해방되고, 바다 안에서 애굽인들은 압도당합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해방되고 죄에서 벗어나며, 그들의 죄는 멸절됩니다. 저들은 홍해를 건넌 후 나와서 광야를 여행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세례 후에는 아직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 중에 삽니다. 이 시대는 광야입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받은 것을 이해한다면 이 시대는 참으로 광야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행해진 것이 단지 신체적인 몸짓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영적인 효과가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 세상이 광야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향을 갈망하며 방랑하는 나그네로 살고 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갈망하는 동안 내내 그들은 소망 중에 삽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광야에서의 이 인내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미 본향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본향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미 본향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길 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길 위에 영원히 머물지 않기 위해서, 본향을 계속 소망하고 본향을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잘못된 길로 들지 마십시오. 시련과 유혹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광야에서 시련과 유혹이 일어나는 것처럼, 세례 후에도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쫓아냈던 애굽인들만이 그들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옛 원수입니다. 마치 우리 모두가 우리의 우두머리인 마귀 아래에서 우리의 옛 삶과 옛 죄들에 의해 쫓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광야에서도 길을 막으려는 다른 원수들이 나타났고, 그들과 전투가 벌어져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마음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곁길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유혹이 일어나 여러분을 길에서 이탈시키고 여러분의 목적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이 세상의 즐거움이나 다른 종류의 삶과 같은 딴생각을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욕망과 제안들을 극복한다면, 원수는 길 위에서 패배하고 백성은 본향으로 인도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10. 사도가 이 일들이 우리를 위한 모형과 상징으로 의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만약 그들이 구름 아래 있었다면 그들은 어둠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둠 아래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고전 10:1-3). 그들에게 광야에서 만나가 주어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인간 삶의 광야를 견디도록 돕는 성경의 달콤함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만나를 받는지 압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왜 "같은"입니까?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그리고 사도가 한 가지 항목은 설명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이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고전 10:3-6). 그 일들은 그들을 위해 수행되었으나 우리를 위한 모형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영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물질적인 겉모습대로만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옛 언약에 속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새롭고 오래된 선택받은 백성
11. 이제 이삭이 늙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삭이 큰아들에게 축복을 주고자 했을 때 그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상징했습니까? 그는 이미 늙어 있었습니다. '늙음'을 통해 저는 옛 언약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구름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 이 옛 언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삭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노년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옛 언약의 오래됨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여전히 큰아들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는 작은아들을 사랑했고 아버지는 맏아들이기에 큰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둘 다에게 똑같이 공정하고 싶었으나 맏아들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아들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옛 언약이 첫 번째 백성에게 약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외에는 아무에게도 약속을 건네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약속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부름받고 원수들에게서 해방되며 바다를 통과하고 만나를 먹으며 언약을 받고 율법을 받고 약속을 받고 약속의 땅 자체를 받습니다. 그러니 그가 큰아들을 축복하고 싶어 했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의 모습으로 복을 받는 것은 작은아들입니다. 어머니가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기서 교회란 주님의 강림과 탄생 이후에 성도가 되기 시작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에 성도였던 모든 사람도 똑같은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시기 전에 살았고, 우리가 그보다 훨씬 나중에, 즉 그리스도의 고난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음으로써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갈 3:7)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본받음으로써 교회에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람 자신을 교회에서 제외할 것입니까?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상징했던 것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옛 언약을 이해하고 그 물질적인 약속들이 영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룩한 예언자들 안에서도 이 교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이라면 모든 영적인 사람은 작은아들에게 속합니다. 먼저 물질적인 것이 오고 나중에 영적인 것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12. 저는 어제 여러분에게 큰아들이 에서라고 불리는 이유는 먼저 "육신에 속한" 자 또는 물질주의적인 자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영적인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육신의 생각(롬 8:6)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항상 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적인 자가 된다면 그들은 작은아들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동생이 형이 될 것입니다. 다른 쪽은 시간에 있어 우선권을 가지나 이쪽은 미덕(덕목)에 있어 우선권을 가집니다. 이 축복에 이르기도 전에 에서는 야고보가 쑨 팥죽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창 25:31). 그는 장자의 권리를 동생에게 팔았습니다. 그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지고 떠났고, 다른 한쪽은 영구적인 영광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일시적인 쾌락과 만족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팥죽을 먹습니다. 그 팥죽은 분명 야곱이 쑤었으나 야곱은 먹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는 애굽의 어디보다도 성행했습니다. 팥죽은 애굽의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팥죽은 이방인들의 모든 오류를 상징합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나오게 될 더 분명하고 명백한 교회가 작은아들 안에서 예표 되었기에 야곱이 팥죽을 쑤고 에서가 그것을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던 우상을 버렸으나 유대인들은 우상을 섬기려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인도되면서도 마음은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원수들이 바다에서 죽임을 당하고 파도에 휩쓸린 후에도, 모세가 보이지 않자 우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한 사람(모세)의 현존에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이 더 이상 거기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위대한 일들을 오직 모세를 통해서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 안에서 하나님을 볼 마음의 눈이 없었기에 몸의 눈으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여 팥죽을 먹었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이제 이것을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 백성 중에서도 장자의 명분이나 권리를 가진 자들은 야곱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삶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서 물질주의적인 자들은 여전히 옛 언약에 속해 있으며 아직 새 언약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에서의 몫을 나누고 있을 뿐 야곱의 복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작은아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13. 여러분, 집중해 주십시오! 눈이 어두워진 노인 이삭은 큰아들을 축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옛 언약이 유대인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이유는 옛 언약이 그들에 의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는 큰아들에게 말하지만 축복은 작은아들에게 임합니다. 모든 성도 안에서 실현되는 이 어머니, 즉 교회는 작은아들에게 조언하며 말합니다. "내가 네 아버지가 네 형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창 27:6-10). 그리고 어머니는 근처 떼에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제안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즐기시는 방식으로 요리할 것이며, 아버지가 그것을 잡수시고 형이 없는 사이에 작은아들을 축복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집했습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야곱은 가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요리가 다 되었고 그는 그것을 아버지 앞에 차려 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말한 대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목소리로는 그를 에서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를 만져보고 털이 많음을 느끼고(어머니가 그의 팔을 염소 새끼 가죽으로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큰아들로 믿고 축복했습니다. 축복하는 동안 아버지는 큰아들을 염두에 두었으나 축복은 작은아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이 큰아들의 모습으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 백성에 대한 옛 언약의 상징과 약속 아래에서 영적인 축복이 그리스도인 백성에게 임했다는 것 외에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대해 듣고 우리도 듣습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약속의 땅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약속의 땅에 대한 참된 이해로 복을 받은 것은 바로 우리이며, 하나님께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시 142:5) 고 말할 수 있는 자도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친 분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즉 교회가 거룩한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물질적인 약속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
14. 그러나 그 축복은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우리 자신의 죄를 씻어낸 지금, 다른 이들의 죄를 인내로 짊어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다 낳았습니다. 한 명은 털이 있게, 다른 한 명은 매끈하게 낳았습니다. 털이 많음은 죄를 상징하고, 매끈함은 온유함, 즉 죄로부터의 깨끗함을 상징합니다. 두 아들이 복을 받는 것은 교회가 두 종류의 사람을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두 아들을 낳았듯이, 교회의 태중에서도 두 부류가 태어납니다. 한 부류는 털이 많고 다른 한 부류는 매끈합니다. 그 차이는 이미 설명해 드렸습니다. 결국 세례를 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를 버리려 하지 않고 예전에 하던 짓을 그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기를 치던 사람들은 다시 사기를 치려 하고, 거짓 맹세를 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위증하려 하며,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던 사람들은 계속 속이려 하고, 음행하고 술 취하던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을 위해 털이 있게 태어난 에서가 있습니다. 야곱은 무엇을 합니까?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서 네 아버지가 너를 축복하게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섭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 안에는 죄인들과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귐 안에서 죄인들과 어울리다가 오염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단과 분열을 통해 멸망합니다.
야곱의 궤계(교묘함)
15. 그렇다면 집안에서 행실이 좋지 않았던 털 많은 에서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성경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창 25:27). 어머니가 그를 사랑한 이유는 그의 즐거운 행동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야곱이 나중에 천사와 씨름했을 때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여기에도 큰 신비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그가 '궤계(간사함)가 없었기 때문에' 복을 받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의를 기울여 그에게 얼마나 간사함이 없었는지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셨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러므로 만약 이 사람이 속에 간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스라엘(야곱) 자신에게도 간사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5) 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그가 장막 안에서 간사함 없이 행동했다고 제시하며, 주님 또한 나다나엘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에게 간사함이 없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간교하게 와서 복을 빼앗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야곱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16. 먼저 간교함(guile)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 야곱이 무엇을 해야 했는지 봅시다. 그는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내심 있게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염소 새끼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다른 이들의 죄를 참아내는 모든 사람은 야곱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씨 안에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 죄도 짓지 않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곱이 그리스도로 변한다면, 그는 다른 이들의 죄—즉 염소 새끼 가죽—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간교함이 있습니까?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두 백성
17.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른 한 명(에서)은 저녁에 와서 아버지가 명령한 것을 가져오고, 자기 대신 동생이 복을 받은 것을 발견하지만 두 번째 복은 받지 못합니다. 그 두 사람은 두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창 25:23). 하나의 축복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백성이며, 야곱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속한 두 백성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큰아들에게 속한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중 작은아들에 속한 일부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으로 갈망하던 그 땅을 취하지 않고, 영적으로는 아무도 육체적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아무도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지 않는 그 도시를 갈망하고 주님의 약속을 이해하기 시작한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다양한 형상으로 표현된 두 백성
18. 그래서 그들이 이 도시를 갈망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야곱에게 속하기 시작했고 유대 땅 자체에 주님의 양 떼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양 떼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또 이 우리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주 예수님께 이방인에게서 온 양들 외에 어떤 다른 양들이 있겠습니까? 이방인에게서 온 양들이 유대인 양들에게 합류합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 후 그분을 보았던 500여 명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간사한 것이 없다고 증언하신 나다나엘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충만히 임했을 때 집에 있었던 120명도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읽는 수천 명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이들은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중에도 양들이 있었고 많은 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는 이방인들 중에도 다른 양들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이 두 백성은 또한 두 개의 벽으로 표현됩니다. 유대인 교회는 할례자들에게서 오고, 이방인 교회는 무할례자들에게서 옵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지만 그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은 말합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 그리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모퉁이가 있는 곳에서 두 벽이 연결됩니다. 두 벽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지 않는 한 모퉁이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한 방향에서만 온다면 모퉁이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마리 염소 새끼는 두 백성이고, 두 양의 우리도 그러하며, 두 개의 벽도 그러하고, 길가에 앉아 있던 두 소경도 그러하며, 물고기를 끌어올린 두 척의 배도 그러합니다. 성경에는 두 백성으로 이해해야 할 곳이 많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야곱 안에서 하나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염소 새끼의 형상
19. 왜 염소 새끼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염소 새끼는 죄인들입니다. 염소는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염소로 계속 남아 있는 자들만이 왼편에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들 모두가 먼저 염소 새끼가 아니었다면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인들과 섞이시고 세리들과 함께 잡수실 때, 유대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양인 것처럼, 즉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사실 그들의 교만 속에서는 숫염소에 더 가까웠지만) 그것을 주님의 죄로 몰아세웠습니다. 정확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자신을 변호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염소나 염소 새끼들을 부르십니다—그러나 염소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야곱은 그것들을 죽여 아버지를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염소 새끼들은 죽임을 당하고 먹히고 하나의 몸으로 소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죄인들 안에서 죄가 죽임을 당하고, 그것들이 도살될 때 교회의 한 몸으로 소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일어나 잡아 먹으라"(행 10:13) 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에 의해 상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들사람이고 이 사람은 집에 머무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형이고 이 사람은 동생이었습니다. 축복은 저 사람을 향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그것들은 형을 향했습니다. 물질적인 약속들이 유대인들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영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야곱이 자신이 짓지 않은 죄들을 대신 짊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에게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사랑하십시오
20. 이제 여러분은 죄를 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짊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죄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기기만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죄인의 죄를 사랑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공격함으로써 죄인을 참아주십시오. 죄인을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랑하십시오. 마치 여러분이 병자를 사랑한다면 열병을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열병을 아낀다면 그것은 병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형제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십시오. 침묵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작은 거짓말로 하지 말고, 그에게 진실을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교정할 때까지는 그를 참아주어야 합니다. 염소 새끼를 죽이는 일과 그 가죽을 입는 일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상징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죄인들에게 항의하는 동시에(염소 새끼를 죽임),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죄를 견뎌내기(가죽을 입음) 때문입니다. 그는 힘닿는 데까지 염소 새끼를 죽였고, 죄인들을 죽였습니다(죄를 끊게 함).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졌고, 관용으로 그것들을 견뎠습니다. 그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기 때문입니다(고전 13:7). 야곱의 어머니는 그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랑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모든 성도를 상징한다면 당연히 사랑도 상징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성도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울리는 괭과리와 소리 나는 심벌즈가 될 뿐입니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예언을 알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전 13:1-3). 그렇다면 그 자체만으로 큰 유익이 되고, 그것 없이는 다른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이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랑 자신이 조언을 하고, 사랑의 아들(야곱)은 그에 순종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삭은 상징적으로 행동했습니다
21. 어머니는 어떤 조언을 합니까? 염소 새끼 가죽을 가지고 아버지께 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작은아들을 축복합니다. 옛 언약은 문자적인 의미에 따르면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그것을 영적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축복이 됩니다. 여러분, 이 거대한 신비, 이 거대한 성례(sacrament)에 집중해 주십시오. 이삭은 '간사함이 없는 사람'에 대해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with guile)"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예언의 영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심할 여지 없이 알고 있었으며, 그 자신 또한 상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징적이고 성례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이 숭고한 진리들에 모든 것을 겁니다. 만약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면, 자기를 속인 아들에게 분명히 화를 냈을 것입니다. 큰아들이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별미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말합니다.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내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2-33). 이삭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입에서 동생을 향한 어떤 저주가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저주를 기다리는 동안 이삭은 그 축복을 확증합니다. 이 얼마나 찬란한 분노이며 놀라운 의분입니까! 그는 실행되고 있는 신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눈이 먼 것은 유대인들의 정신적 맹목함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눈은 펼쳐지고 있는 신비들의 숭고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다양한 형상들
22. 이삭은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5)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간교하게(with guile)'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간교함(궤계)은 실제 간교함이 아닙니다. 어떻게 간교함이 간교함이 아닐 수 있습니까? '반석'이 실제 바위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바다'라고 불리지만 다른 것을 의미하기에 바다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땅'이라 불리지만 땅이 아니며, '산'이라 불리지만 산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불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 사자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어린 양'이라 불리지만 양이 아니며, '짐승'이라 불리지만 짐승이 아닙니다. '송아지'라고도 불리지만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것은 '간교함'이라 불리지만 실제 간교함이 아닙니다. 그러니 왜 그것이 간교함이라 불리는지 알아봅시다. 다른 것들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도 알아봅시다. 왜 그분은 사자라고 불립니까? 힘과 용기 때문입니다. 왜 반석입니까? 견고함 때문입니다. 왜 어린 양입니까? 무죄함 때문입니다. 왜 송아지입니까? 희생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왜 산입니까? 위대함 때문입니다. 왜 만나입니까? 달콤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간교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간교함이 무엇인지 보아야 하며, 그러면 왜 그것이 간교함이라 불렸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반석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데도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을 반석이라 부르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반석이라 부릅니다. 칭찬할 때는 반석의 견고함을 취하고, 비난할 때는 그 딱딱함을 취합니다. 우리는 반석의 견고함을 알며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우리는 사자의 힘과 용기를 압니다. 그런데 마귀 또한 사자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 '사자', '어린 양', '반석' 등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간교함'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야곱의 간교함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23. 그렇다면 간교함이란 무엇입니까? 간교함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른 일인 척하는 것입니다. 의도와 행동이 다를 때 그것을 간교함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본래 의미에서의 간교함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마치 본래 의미에서의 '돌'과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본래 의미의 '바위(돌덩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래 의미의 '송아지(짐승)'라고 말하는 것이 신성모독인 것과 같습니다. 본래 의미에서 송아지는 짐승이지만, 비유적 의미에서는 제사의 희생물입니다. 본래 의미에서 돌은 굳어진 흙이지만, 비유적 의미에서는 확고함입니다. 본래 의미에서 간교함은 기만이지만, 비유적 의미에서는—그것은 비유적 의미 그 자체입니다. 모든 비유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텍스트나 발화는 물질적으로는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다른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 비유적 의미를 '간교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간교하게 행해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행해진 일이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삭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간교하고 기만적인 사람에게 축복을 확증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 기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야곱이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창 27:24)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에서가 동생과 거래를 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동생에게서 산 것을 자신이 가졌다고 아버지께 말한 것입니다. 에서가 잃어버린 것이 야곱에게로 넘어온 것입니다. 이삭의 집안에서 '장자'라는 명칭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으나, 그것을 판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동생에게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 안에 담긴 상징적 신비를 알았기에 이삭은 축복을 확증하며 다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대답합니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도 축복하소서"(창 27:37-38). 그러나 이삭은 오직 하나의 축복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야곱을 향한 이삭의 축복
24. 왜 하나뿐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제가 설명하고 여러분이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들을 살펴보고, 야곱이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이고 에서가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인지 봅시다. 이삭이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말했습니다.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창 27:4, 24-26). 이삭은 다른 아들에게는 입 맞추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평화의 인사로 시작됩니다. 왜 이삭은 그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기 위해 입을 맞추었습니까? 야곱이 평화를 위해서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았습니다(창 27:27). 야곱은 형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즉, 형이 상실한 장자의 영광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그것을 잘못되게 잃었으나 야곱에게서는 그것이 합당한 향기를 냈습니다. 이삭이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옷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밭의 향취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비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시고, 그리스도의 옷으로서의 교회를 이해하십시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교회의 다양한 형상들
25. 여러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한 가지 실재가 여러 방식으로 상징될 수 있습니다. 즉, 저 두 마리 염소 새끼로 상징되는 교회가 이 '옷'으로도 상징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실제 모습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니며 상징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사자가 될 수 없고 사자는 어린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자인 동시에 어린 양이실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사자도 양도 아니시지만 상징적으로는 사자이자 양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염소 새끼가 옷이 될 수 없고 옷이 염소 새끼가 될 수 없으나, 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염소 새끼도 옷도 아니지만 상징적으로는 염소 새끼인 동시에 옷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불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26. 이삭은 그의 옷 냄새를 맡고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창 27:27) 라고 했습니다. 이 밭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밭이라는 것을 증명해 봅시다. 사도가 신자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교회는 밭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밭을 경작하는 분이십니다. 주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5). 이 밭에서 일꾼으로 수고하며 영원한 상급을 바라는 사도는 일꾼으로서의 몫 외에는 자신에게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사도가 어떻게 겸손을 지켜 야곱에게 속하려 하는지, 즉 교회라는 그 밭에 속하려 하며 '풍성한 밭의 향취'와 같은 옷을 잃지 않으려 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는 생각은 물질주의적이고 오만함은 넘쳐나는 에서의 교만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밭의 향취는 아들의 옷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밭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삭은 "여호와께서 복 주신"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7-29). 이것이 야곱의 축복입니다. 만약 에서가 복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복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은 아니었지만, 이것과 아주 다르지도 않은 복이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에서를 향한 이삭의 축복
27. 이제 에서가 어떻게 축복을 받는지 들어봅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인 아들들과 물질주의적인 아들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다른 이들의 죄를 참아내는 자들과 자기 자신의 죄만을 짊어진 자들 사이의 차이, 항상 영적인 방식으로 사는 자들과 항상 물질주의적인 즐거움 속에서 쾌락을 찾는 자들 사이의 차이를 봅시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높여 울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니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3-35).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야곱이 에서를 밀어내다
28.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창 27:36). '야곱'은 발꿈치를 잡음(tripping up), 즉 밀어내어 쓰러뜨림을 의미합니다. 이 '밀어내 쓰러뜨림' 또한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간교함과 마찬가지로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야곱이 이름을 얻었을 때 그는 아직 형을 쓰러뜨릴 계획을 세울 만큼 악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이 태어날 때 자기 손으로 형의 발을 잡았기 때문에 '발꿈치를 잡은 자'라고 불렸습니다. 이제 물질주의적인 마음을 가진 자들을 밀어내어 쓰러뜨리는 것이 영적인 마음을 가진 자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모든 물질주의자는 교회 안의 영적인 사람들을 시기할 때 밀려 넘너지며, 그로 인해 더 악해집니다. 사도가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특히 사도는 이삭이 여기서 말했던 그 '향기'를 언급합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즉, 우리가 아무런 잘못 없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위한 사망의 냄새가 될 수 있는지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오직 선한 삶을 사는 법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구한 삶을 시기하는 자들은 중대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시기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됩니다. 주님 자신이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셨고 박해자들에게는 사망의 악취가 되신 첫 번째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기에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찼고, 죄가 없으신 분, 성도 중의 성도를 죽이는 거대한 죄를 범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가 그들에게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 속에서 밀려 넘어진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29. 이삭이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이미 말이 선포되었기에 에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도 축복하소서" 하니 이삭이 소리를 높여 우니라(창 27:37-38). 여기서 이삭은 억눌린 상태, 즉 강요당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큰 문제, 큰 성례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강요에 못 이겨 그는 축복합니다—하지만 어쨌든 그는 축복합니다. 그가 축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강요에 의해 한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온 마음을 다해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강요에 의해 축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축복의 내용을 조사하며 이해해 봅시다.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두 축복의 차이점
30. 이삭이 응답했습니다—에서는 분명 아버지로부터 입맞춤을 받지 못했습니다—그에게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서 멀 것이며(비유적 해석: 에서의 거처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부터일 것이며)" 이삭은 야곱에게도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부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야곱과 에서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만 고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만민이 너를 섬기리라." 또 야곱에게 고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네 형제들이 다 네 종이 될 것이며,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에서 또한 야곱에게는 말해지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그러나 자유 의지를 빼앗지 않기 위해—제가 어제도 말씀드렸듯이—이삭은 덧붙였습니다.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창 27:40).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원한다면 자유롭게 회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더 이상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야곱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에서로부터 회심한 모든 자는 야곱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닮음(likeness)은 그들을 하나로 만들고, 닮지 않음은 갈라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은 둘 다 가집니다. 만민이 섬기는 것과 형제들과 아버지의 아들들이 굴복하는 것은 오직 야곱만 가집니다. 칼을 믿고 사는 것은 오직 에서뿐입니다. 그들은 공통된 것과 각자에게 고유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선인과 악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31. 교회 안에는 에서에게 속한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또한 리브가의 아들들이고 어머니 교회의 아들들이며, 그녀의 태에서 났으나 물질주의적인 죄를 고집함으로써 털이 많습니다—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태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습니다. '하늘의 이슬'로부터는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받으며, '땅의 기름짐'으로부터는 눈에 보이는 모든 성례를 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례는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 안에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통으로 나눕니다. 네, 그들 또한 성례에 참여하고,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밀과 포도주를 취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늘의 이슬로부터 무언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모든 사람 위에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물을 줍니다. 그러나 누가 물을 주는지, 무엇에 물을 주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두 부류 모두에게, 즉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물을 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그 선한 비를 가시 뿌리로 바꾸어 버리고, 선한 사람들은 그 선한 비를 흡수하여 열매로 바꿉니다. 주님은 곡식과 가시 덩굴 위에 똑같이 비를 내리시지만, 비는 곡식은 창고로, 가시는 불속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 위에 비처럼 내립니다. 모두가 자신이 어떤 뿌리를 가졌는지 보게 하십시오. 모두가 그 선한 비를 어떤 용도로 쓰는지 보게 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가시를 만드는 데 쓴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비를 탓할 일입니까? 뿌리에 닿기 전까지 그 비는 맑고 신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마음에 닿기 전까지 맑고 신선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비를 자신의 기만적인 목적에 쓰고, 위선에 쓰고, 사악한 욕망의 뿌리를 키우는 데 쓰며, 자신의 비뚤어짐과 부패에 사용합니다. 그것은 가시를 내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선한 비의 결과입니다. 하늘의 이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악인도 하나님의 성례에서 제외되지 않기에, 이미 신자들의 신비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땅의 풍성함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선과 악
32. 이러한 것들이 두 부류 모두에게 속해 있는 반면, '모든 민족'은 오직 영적인 부류에게만 속합니다. 이들이 곧 온 세상을 채운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의 깊게 보시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그 차이를 보십시오. 모든 영적인 사람은 전 세계에 퍼진 교회가 하나이며, 참되며, 보편적(catholic)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며, 주님께서 속이지 않는 최후의 키질하는 자로 오셔서 타작마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태우기 위해 따로 두실 때까지, 그 타작마당에서 쓸어낼 수 없는 사람들의 죄를 참아냅니다. 보십시오, 쭉정이를 걸러내어 알곡과 분리하고 밀을 위한 곳간과 쭉정이를 위한 불을 준비하는 과업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 누구인지 아시기에, 마지막에 분리될 죄인들을 참아주십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죄인들과 모든 물질주의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들과 뒤섞여 있으며 그들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종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다면 이 말을 하려 하며,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말해야만 합니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낼지라도 그들은 저를 용서해야 합니다. 네, 제가 말했듯이 저는 두렵습니다. 그들이 저의 두려움을 용서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그런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주저한다고 해서 주님이 저를 아끼지 않으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려는 말을 잘 들으시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야곱과 에서 모두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을 받았습니다. 둘 다 제가 이미 말한 것들, 제가 알고 여러분이 아는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야곱만이 만민이 그를 섬길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교회의 영적인 사람들만이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의 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영적인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이 종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비록 그들이 원치 않는 결과를 낳고 있을지라도, 물질주의적인 자들의 악한 방식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됩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그 악한 방식들로부터 유익을 얻고 그들의 인내를 통해 면류관을 얻기 때문입니다.
에서, 물질주의적인 자들의 우두머리
33. 여러분, 제가 하는 말에 집중해 주십시오. 반면 에서는 만민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물질주의적인 사람은 분열되어 있거나 쉽게 분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나투스파(Donatus)를 보십시오.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물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이었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거나 인내심을 잃었기에 첫 번째 기회가 오자마자 분열하여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사랑했고 그것에 큰 가치를 두었으며, 교만의 뜨거운 바람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 13:7, 4).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무엇을 가졌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들어줄 그 한 가지(사랑)를 가지지 못했기에 그들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행된 모든 이단이나 이탈, 분열은 바로 이들과 같은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인 생각을 가졌고 자신의 공상으로 우상을 만들어 길을 잃었으며, 보편적 신앙(Catholic faith)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반박당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성향의 무게에 못 이겨 제외되었습니다. 혹은 사람들과 다툼을 일으키고 대립을 구하다가 스스로를 잘라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라고 말해진 그 칼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스스로를 잘라냈겠습니까? '칼'이 항상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선 예들처럼, '돌'이 그리스도에게는 확고함을 의미하지만 미련한 자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적용되는 것과 같고, 그리스도가 한 가지 이유로 사자라 불리고 마귀가 다른 이유로 사자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칼 또한 선한 의미로 이해될 때가 있고 나쁜 의미로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칼이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어떤 악의 신비가 그것에 의해 상징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언급된 종노릇 또한 이 신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교회 안의 쭉정이
34.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스스로를 잘라낸 자들이 분열의 칼을 휘두르고, 그 칼에 죽고, 그 칼로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일치(unity)에서 스스로를 잘라낸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 갈가리 찢겼는지 보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도나투스파가 얼마나 많은 파벌을 낳았습니까? 칼을 휘두르는 자가 칼로 망한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관찰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분리되지는 않았으나 마치 분리된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명예로운 지위를 사랑하는 자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속적인 편의를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그들 모두가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들도 쭉정이입니다. 단지 바람이 부족해서 아직 타작마당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혹(temptation)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있었다면 그들은 타작마당에서 날아갔을 것입니다. 어쨌든 교회가 그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을 잘라내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밖에서 얼마나 쉽게 모여들면서도 자신들의 탁월함(pre-eminence)은 포기하기를 거부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이 지위를 위해 얼마나 기꺼이 죽으려 합니까! 그들은 얼마나 결연하게 공동체들을 자기 발아래 두려 하고, 그리스도의 일치로 넘겨주려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양들을 사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린 적이 없으면서도, 얼마나 결연하게 그 양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 합니까! 그들은 양들을 사지 않았기에 양들을 값싸게 여깁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오래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온 교회에 퍼져 있는 그들을 주목하십시오. 아직 안에 있는 자들이나 기회가 생겨 타작마당에서 날아가 알곡까지 끌어가려는 자들을 관찰하십시오. 그러나 참되고 꽉 찬 알곡은 쭉정이를 참아내며 마지막 키질하는 자가 올 때까지 타작마당에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마치 염소 새끼 가죽을 쓴 그 사람(야곱)이 다른 이들의 죄를 참아내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교회 안의 악한 자들을 감당함
35. 그런데 왜 이삭은 거칠게 다루어진 후에야 축복을 주었을까요?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서 억지로 강요당한 상태에서 아버지는 에서에게 말했습니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서 멀 것이며(비유적 해석: 에서의 거처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부터일 것이며)." 그리고 당신이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선하다고 상상하지 않도록—"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그러나 여러분이 스스로를 고칠 수 있기에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도록—"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거칠게 다루어졌을 때 이 축복을 그에게 '던져준' 것이지 '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회를 어지럽히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위해 그들을 참아주고 공통된 성례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때때로 그들이 악하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증거나 확신을 얻을 수 없어 그들을 교정하거나 직위에서 해임하고, 제외하거나 출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고발을 강행하면 때때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도록 강요받는 셈입니다. "여기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이 있다. 성례를 사용하라. 너는 스스로 정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너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성례에 참여하도록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오직 소동을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네가 칼을 믿고 살게 될 이유이다. 네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는, 너는 그것으로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못하며, 너는 주님이 얼마나 달콤하신지 보지 못한다. 만약 이것이 너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만약 네가 주님의 달콤함을 발견했다면, 너는 마귀의 교만 대신 주님의 겸손을 본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으로부터 주님의 겸손의 신비를 받으면서도, 항상 다툼과 분쟁을 즐기는 마귀의 교만(제가 그와 상관없기를 바랍니다!)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 여러분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안에서 이 교제를 가질 수 있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칼을 믿고 살고 있으며, 다툼과 분쟁 속에서 즐거워하거나 그것들 때문에 넋이 나갈 정도로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목에서 멍에를 벗어 던지십시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유혹에 맞서 싸우라는 권면
36. 형제 여러분,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신비들의 위대함을 생각하면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아마 아주 적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저의 능력과 여러분의 능력을 생각하면 실로 아주 많은 양이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 문제가 너무 명확하게 논의되지 않았다면, 시간의 부족과 저의 능력 및 여러분의 수용 능력의 한계를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깨닫고 싶다면 성숙해지십시오. 성숙해지고 싶다면 선한 삶을 사십시오. 선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성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주님께서 순교자 빈센트의 탄생 축일을 맞아 여러분을 위해 이 잔치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이름(Vincent)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박해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귀는 항상 박해자이며, 면류관을 얻을 기회는 결코 모자라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이 전투의 본질을 이해하고 누구를 물리쳐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공격하는 뚜렷한 적이 없다고 해서, 물질주의의 유혹으로 여러분을 습격하는 숨은 박해자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가 얼마나 많은 사악한 것들을 제안하며, 탐욕을 통해, 두려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이러한 유혹들로 그는 여러분이 머리가 아플 때 점술가나 점성술사에게 가도록 설득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의 부적에 의지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의 치료법이 아마 몸에 효과적일 것이라는 제안을 받은 누군가가—그리고 마귀가 그로부터 제물을 받았을 때 마귀가 그의 마음을 소유했기에 그의 몸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어 그가 나았다고 말해지는 경우—이러한 불경한 치료법을 제안받았을 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나는 그런 치료법을 쓰느니 차라리 죽겠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나를 채찍질하시고 나를 건져내신다. 만약 그것이 필요하다고 그분이 아신다면 나를 건져주실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생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분이 아신다면, 내가 슬프든 기쁘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 어쨌든 짧은 시간 후에 나는 주님께로 갈 것이며, 문제는 내가 어떤 얼굴로 그분 앞에 설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귀의 치료법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내가 내 몸을 위해 며칠을 더 사려고 내 영혼을 파멸시켜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사악한 치료법을 고안하는 데 마음을 쓰기를 거부하는 자는 분명 승리한 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방금 한 가지 사례를 보여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두 마귀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제안할 수 있는지 보셨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아주 기력이 없고 침대에서 숨을 헐떡이며 사지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혀조차 거의 놀리지 못하는 이 사람을 보십시오. 이 지친 사람이 마귀를 이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들과 싸워 승리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병상에서 마귀를 이기고 그에 대한 면류관을 씁니다. 겉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으나, 내면의 마음속에는 그런 큰 힘을 가지고 그런 위대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숨겨진 곳에 승리 또한 숨겨져 있습니다.
결론
37. 형제 여러분, 제가 왜 이 모든 말을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순교자들의 탄생을 축하할 때 순교자들을 본받게 하려 함이며, 요즘은 그런 종류의 박해가 없다고 해서 면류관을 얻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유혹의 제안이나 육체적인 고통과 괴롭힘을 통한 마귀의 일상적인 박해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여러분보다 앞서 하늘에 들어가신 사령관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따를 길을 주셨으니 그분께 굳게 붙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이 이길 때마다 교만하여 마치 자신의 힘으로 그 싸움을 치른 것처럼 자신에게 공로를 돌리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길 힘을 주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친히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마귀의 모든 유혹을 이겨낸다면, 여러분은 항상 면류관을 쓰고 이곳을 떠나 순교자로서 가게 될 것입니다.
원문 or 출처
Saint Augustine, Sermons 1–19 on the Old Testament, edited by John E. Rotelle, translated by Edmund Hill, Vol. III/1,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the 21st Century (Hyde Park, NY: New City Press, 1990), pp. 2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