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목: 설교 제7번
떨기나무는 불꽃 가운데 있었으나 타버리지 않았도다: 오순절 후 금식 기간 중 선포된 설교
일시: 서기 409년
본문
떨기나무의 기적
1. 거룩한 본문이 낭독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호기심을 그토록 자극했던 그 위대한 기적을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호기심 또한 자극되었습니다. 어떻게 불이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 나무가 타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다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경이 먼저 '주님의 사자(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말한 뒤, 모세가 천사가 아니라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장면을 주목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그를 보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해줄 대답을 얻기 위해 물었을 때—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고 대답하신 것에 주목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해 이어서 반복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 후에도 여전히 덧붙이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출 3:15) 이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바를 들으십시오. 이것들은 참으로 위대한 문제들이며, 마치 하나님의 신비들을 둘러싸고 있는 덮개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들을 온전히, 그리고 그 가치에 맞게 풀어내려 한다면 시간도 우리의 능력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유대 백성의 형상인 떨기나무
2. 가능한 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이 있었으나 그 나무가 타버리지 않은 것은 헛된 일도, 의미 없는 일도 아니며, 감추어진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떨기나무는 일종의 가시나무입니다. 땅이 죄인을 위해 낸 것(가시)이 여기서 찬양받을 만한 무언가를 표상하기 위해 언급되었을 리 없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처음에 죄를 지은 인간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8)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떨기나무가 타버리지 않은 것, 즉 불꽃에 불이 붙지 않은 사실이 어떤 선한 것을 의미한다고 상상해서도 안 됩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만약 천사나 주님이 나타나신 저 '불꽃'이 어떤 선한 것을 의미한다면—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말입니다—우리는 마땅히 이 불로부터 빛을 얻어야 하며,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타버리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타버리지 않은 떨기나무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대항하며 투쟁했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떨기나무는 가시 돋친 유대인 백성을 상징하며, 모세가 보냄을 받은 바로 그 백성을 의미합니다. 떨기나무가 타버리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들의 완악함과 고집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백성이 가시로 표상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의해 가시관을 쓰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자인가 아니면 주님인가
3. 모세와 대화하던 분이 '주님의 사자(천사)'라고도 불리고 '주님'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은 커다란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성급한 단정이 아니라 세심한 조사를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될 수 있는데, 둘 다 신앙에 부합하므로 어느 쪽이든 참일 수 있습니다. 내가 둘 다 참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록자(모세)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든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할 때, 때로는 기록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은 신앙의 규칙, 진리의 규칙, 그리고 경건의 규칙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의견을 모두 제시하겠습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세 번째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제안 중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그분이 주님의 사자이자 주님으로 불리는 이유가 사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기묘자(Angel of great counsel, 위대한 조언의 사자)” (사 9:6, 70인역 참조)라고 부릅니다. '사자(Angel)'는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Angel'은 그리스어로, 라틴어로는 'nuntius', 영어로는 'messenger(전령/사자)'입니다. 그러므로 '사자'는 어떤 행위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를 할 때 사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가져다주셨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또한 사자, 즉 전령은 그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분에 의해 보냄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분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보냄을 받은 분이십니다. 결국 실로암 못의 뜻도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요 9:7). 그래서 주님은 진흙으로 눈을 바른 그 사람에게 거기서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씻김을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의 눈도 뜨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자와 주님은 한 분이시며 동일한 분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단일성과 삼위일체
4.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변에는 성부와 성자가 본성에 있어 크게 다르며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가톨릭) 신앙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며, 나눌 수 없고 동등한 한 본질의 삼위(Triad)라고 믿습니다. 이들은 연합에 의해 혼합되지 않으며, 구별에 의해 서로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이단들은 성자가 조상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논증을 펼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성부는 보이지 않으셨다. 이제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분은 본성상 다르다. 그러므로 성부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딤전 6:16)라고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모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심지어 아담 자신에게까지 보였던 그분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이시며, 오히려 피조물로 가정되거나 이해되어야 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보편 교회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도 불변하시고 성자도 불변하십니다. 성부도 영원하시고 성자도 공영원(coeternal)하십니다. 성부도 보이지 않으시고 성자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부는 보이지 않고 성자는 보인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본질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 분리해 버린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됩니다.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분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있어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원하실 때, 원하시는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의 본체 그대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봉사를 받으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나신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마음이 몸 안에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할 때 마음이 나타나는 그 목소리는 마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과 목소리가 서로 다른 것임을 의미하지만, 마음은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통해 명백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나타나셨을지라도 그분은 불이 아니십니다. 연기 속에 나타나셨어도 연기가 아니시며, 소리 속에 나타나셨어도 소리가 아니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한다면, 모세에게 나타나 주님이자 주님의 사자로 불린 분이 성자이실 수 있다고 안전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자인가
5. 반면,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실제 '주님의 사자(천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왜 그가 '주님'으로 불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왜 '사자'라고 불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자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왜 '주님'이라 불렸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자'라고 불리는 난관을 어떻게 벗어나는지 내가 이미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선지자가 주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위대한 조언의 사자'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자'라고 말하는 이들은 왜 그가 '주님'이라 불렸는지 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선지자가 성경에서 말할 때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선지자가 주님이라서가 아니라 주님이 선지자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서나 선지자를 통해서와 같이 천사를 통해 말씀하기로 하셨을 때, 그것이 천사이기에 '사자'라 부르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기에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실로 바울은 인간이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으나, 사도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하느냐” (고후 13:3)라고 말합니다. 선지자 또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안에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시 85:8, 70인역 참조)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천사 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주님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났고 주님이라 불렸으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의 목소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데로 돌아가지 말찌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
6. 결국 만약 그분이 한 존재였음에도 '사자'라 불렸기에 그것이 정말로 그리스도였다면, 아브라함에게 세 분이 나타나셨을 때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 경우에 우리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세 분이 나타나셨는데 아브라함은 마치 한 분에게만 말하듯 “주여(Lord, 단수형)” (창 18:2)라고 불렀습니다. 왜 세 분입니까? 삼위일체 자체였을까요? 그렇다면 왜 단수형으로 "주여"라고 불렀습니까? 삼위일체는 세 주님이 아니라 한 주님이시며,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본질이며 세 위격입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부는 오직 성자의 아버지이심으로 그러하시고, 성자는 오직 성부의 아들이심으로 그러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십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비록 어떤 이들은 저 세 분 중 한 분이 우월하셨고, 아브라함이 다른 두 분과 함께 나타나신 그분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하신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 중 두 분이 소돔으로 보내져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나타났을 때, 롯 또한 그들 가운데 계신 신성을 인정하며 두 분을 보고 있음에도 단수형으로 "주여"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분을 "주여"라고 불렀고, 롯은 두 분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를 나누어 소돔에서 이위일체(duality)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우리의 조상들이 천사들 안에서 주님을 인정했고, 거처 안에서 거주자를 보았으며, 보좌를 운반하는 자들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견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히 2:2)라고 한 말씀에 의해 확증됩니다. 사도는 구약에 관해 말하면서 거기서 천사들이 말하고 있었음을 지지하지만, 하나님의 천사들 안에서 하나님이 경배받으셨고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이 천사들을 통해 들려졌음을 보여줍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또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기소하고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목이 곧은 자들, 타버리지 않는 가시들입니다—“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떨기나무가 타버리지 않은 이유는 죄인들의 가시가 불꽃의 성령을 거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행 7:51-53) 만약 스데반이 '천사'가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위대한 조언의 사자'라고 불렸다는 이유로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할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브라함의 씨가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관리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관리되었습니까? 그는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갈 3:19)라고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의 의미
7. 이제 천사가, 그리고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있다(Is/존재하다)"는 변하지 않는 분의 이름입니다. 변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모습이기를 그치고 예전에 없던 모습이 되기 시작합니다. '있다'는 '있다'입니다. 진정한 '있다', 참된 '있다', 실재하는 '있다'는 오직 변하지 않는 분에게만 속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참된 '있다'를 가지고 계시며, 그분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변하려니와 주는 여전하시고.” (시 102:26-27)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가 "나는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가 "변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피조물이 아닙니다—하늘도, 땅도, 천사도, 능력도, 보좌도, 주관도, 권세도 아닙니다. 이처럼 이것이 영원의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분이 '자비의 이름'을 갖기로 하셨다는 점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출 3:15) 저 이름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요, 이 이름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모세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말씀을 이해했을 때—참으로 그는 이해했기에—그는 이것이 인간들에게 큰 의미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분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차이를 보았습니다. '존재하는 것',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단 한 번의 번개처럼 찰나일지라도 유일하고 참된 존재로부터 나오는 지극히 작은 빛의 줄기에 부딪혔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저 아래에 떨어져 있는지 보았습니다. 자신이 그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를 보았습니다.
마치 황홀경 속에서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시 116:11)이라고 선언한 자와 같습니다. 그의 마음은 고양되었고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황홀경 속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했습니까?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시 31:22) 이처럼 모세는 자신이 들은 바(그에게 보여진 바가 아니라)에 미치기에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았고, 스스로는 그것에 도달할 능력이 거의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존재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그의 갈망이 타올랐고, 그는 대화하고 있던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8)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자 자신과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저 탁월한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절망하듯 하는 이 두려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격려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라고 말했기에 너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고, 스스로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음을 절망했다. 용기를 내라, 아직 소망이 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존재하는 것 그 자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찾고 '계신 분'을 추적할 수 있다면—진실로 그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행 17:27-28)—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그분의 존재를 찬양하고 그분의 자비를 사랑합시다. 아멘.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원문 or 출처
Saint Augustine, Sermons 1–19 on the Old Testament, ed. John E. Rotelle, trans. Edmund Hill, vol. I,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the 21st Century (Hyde Park, NY: New City Press, 1992), 80–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