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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율법이라는 거울

조엘 비키 박사

율법이라는 거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주일, 제4문)

시편 찬송: 363:1, 2, 5 성경 봉독: 마가복음 10:17-27 시편 찬송: 281 시편 찬송: 136:1, 3 시편 찬송: 312


본문

사랑하는 회중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주일 제4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제4문: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2:37-40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지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잠시 언급하기 시작했던 주제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이라는 거울

  1. 율법의 위대한 계명

  2. 우리의 위대한 불순종

  3.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

다시 반복합니다. 율법이라는 거울: 율법의 위대한 계명, 우리의 위대한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번째 부분, 즉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초점을 맞춘 부분에 대해 다소 상세한 강해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비참함에 관한 이 질문들을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우리 자신의 죄와 위험한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 금방 지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이 상세한 '주일'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죄를 알게 되는지 말하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시기를 권합니다. 모든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 유일한 구원자 주 예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비참함이라는 구덩이 속으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회중 여러분, 비록 우리가 이 질문들을 하나하나 강해해 나가겠지만, 제4주일의 끝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비참하고 죄악된 상태와 조건이라는 그 바닥 없는 구덩이의 밑바닥에까지는 다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죄와 부패의 깊이를 아십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비참함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보았으며, 마칠 때 성령께서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확신시키심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게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4문에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거울(looking glass)" 또는 "반사경(mirror)"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율법을 거울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는 거울이 무엇인지 압니다. 소년 소녀들, 청년들, 부모님들과 어르신들, 우리는 매일 거울 앞에 섭니다. 차를 운전할 때도 거울을 봅니다.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할 때도 우리 모습이 어떤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더 깊은 거울,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거울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 거울은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이 거울은 우리에게 비참함을 가르쳐서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도록 인도하기 위한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사는 제4문에서 묻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율법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4문의 답변에서 그 십계명을 한 단어로 요약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죄에 대한 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적절한 준비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율법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중 여러분, 율법은 단순히 "하라"와 "하지 말라"는 조항이 나열된 목록 그 이상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아주 짧은 요약을 보고 매우 불쾌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요약하기보다는 오히려 확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계명은 가볍고 어떤 계명은 무겁다.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며 어떤 것은 가장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다양한 법의 차트를 만들었습니다. 유대교 주석들과 탈무드, 미슈나, 그리고 다른 유대 서적들을 보면 그들이 613개의 법 체계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는데, 정통 유대교에서는 이 모든 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중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성격의 법이었고, 248개는 긍정적인 성격의 법이었습니다.

613개의 법을 암기하는 데 익숙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율법이 무엇을 말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분이 "율법은 613개가 아니라 오직 한 가지만을 말한다. 율법은 '사랑하라'고 말한다"라고 답하셨을 때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법과 인간이 만든 부가 조항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한 단어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율법은 사랑을 요구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들아, 너희는 유대인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너희는 그들에게 이 613개의 법을 준다. 너희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주면서 정작 너희 자신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너희는 율법이 사랑의 마음을 요구한다는 율법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회중 여러분, 놀라운 점은 예수님께서 그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유대인들이 613개의 계명으로 도달했던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613개의 법은 예수님께서 한 단어로 말씀하신 것만큼 많은 것을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울로 알려졌던 바울은 그 613개의 계명을 모두 지키는 데 아주 능숙했습니다. 부자 청년 관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울과 부자 청년 관원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의 조문을 외적으로 준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겉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보기에 순종적으로 살았고, 스스로도 그 순종에 대해 만족스럽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외적인 도덕주의를 베어내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저의 마음을 더 깊이 살피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느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의 강령이니라." 아마 여러분은 "두 계명입니까? 방금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의 계명일 뿐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참으로 본질적으로는 사랑이라는 오직 하나의 계명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의 첫째 돌판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둘째 돌판은 모두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 사랑은 "이 사랑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저 사랑으로는 이웃을 사랑하겠다"라고 말하는 식의 나누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의 정신은 포괄적인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이 바로 큰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greatest)" 계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법을 '가장 큰 것', '큰 것', '작은 것'으로 나누어 도식화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크고 광범위한 계명이다.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둘째 계명은 결코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첫째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 역시 큰 계명입니다. 이 두 큰 계명은 함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앞에 율법이라는 거울을 두시고 그 거울 위에 "사랑"이라는 커다란 글자를 쓰십니다. 그분은 여러분과 저에게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고 요청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사랑을 요구하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오늘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우리 내면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샘물입니다. 성경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난다고 말씀합니다.

친구여, 여러분의 생명의 샘물과 여러분의 애정의 뿌리,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욕구와 생각의 기초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오늘 말할 수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여러분의 묵상은 하나님께 있습니까?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합니까? 하루를 지내는 동안 여러분의 묵상은 그분께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삽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온 마음—즉 여러분의 온 삶—이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목숨을(soul)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기서 '목숨(soul, 영혼)'은 우리의 가장 깊은 목적과 애정, 우리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항상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고난과 역경으로 치실 때, 여러분은 사랑으로 그분께 응답합니까? 여러분의 모든 애정과 모든 의지와 모든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뜻을(mind)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언급하신 세 번째 것입니다. "네 뜻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 우리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포함한 지적 능력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의 생각이 그분께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주께서 내게 보배로우신 결과로 주를 향한 나의 생각 또한 보배롭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힘을(strength)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의 손으로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의 발로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의 눈으로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의 육체의 모든 기능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합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로서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향하고 있습니까?

회중 여러분,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부자 청년 관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갑니다. 처음 네 계명이 담긴 첫째 돌판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머지 여섯 계명이 담긴 둘째 돌판은 여러분의 온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사랑이 종교의 핵심(soul)입니다. 이 사랑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사랑은 모든 은혜의 여왕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 속에서도 영원히 머무를 유일한 은혜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이 되고 소망은 성취로 바뀌겠지만,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죄가 없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므로 믿음도 필요 없을 것이나, 사랑은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이 불타는 사랑과 서로를 향한 이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기껏해야 어떤 외적인 일반 은혜적인 사랑만을 가질 뿐이며, 대개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만 그 사랑을 더 풍성하게 베풉니다.

회중 여러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율법은 완벽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맥박이 규칙적으로 뛰듯이, 율법은 우리 삶 전체를 통해 매 순간 사랑이 우리의 온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 율법이라는 바늘이 오늘 우리의 양심을 찌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친구여,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들을 때 여러분은—비록 여러분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도덕적이었을지라도—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키지 못하였나이다. 비록 다른 청년들이 저질렀던 많은 외적인 죄들을 짓지는 않았을지라도, 나는 사랑하라는 명령을 끊임없이 어겼습니다. 나는 법을 어긴 자(law-breaker)입니다."

회중 여러분, 우리가 우리 평생 단 하루라도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 3:10).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뭅니다. 만약 우리의 생활 방식이 부자 청년 관원처럼 티 한 점 없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라. 그리고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 증명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 나의 죄를 확신시키실 때, 그분은 내 앞에 "사랑(LOVE)"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쓰인 율법이라는 거울을 두십니다. 그러면 내 양심이 다루어야 할 것은 단지 내가 실제로 저지른 '자범죄'들만이 아니라, 내가 행하지 않은 '부작위의 죄'들과 사랑하지 않은 죄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그때 나는 나의 온 삶이 불의의 흐름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내가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나의 사랑 없음을 모른다. 아무도 내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악한지 모른다. 아무도 나의 온 존재가 부패했으며 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친구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완벽한 사랑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예, 완벽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완벽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이며, 그것은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는 날이 저물어 선선할 때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그녀를 자신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을 맺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써 이 사랑의 결속을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만은 압니다. 그들이 순종하는 동안에는 "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완벽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단순히 일반 은혜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회중 여러분, 하지만 그들이 타락했을 때 이 모든 것은 역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엇보다 섬기고 하와를 자신보다 앞세웠던 아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때 아담은 '아담'을 섬겼습니다. 그때 주님은 아담의 리스트에서 마지막 순위가 되었습니다. 누가 변했습니까? 율법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변했습니다.

회중 여러분,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거울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법을 어긴 자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계속해서 완벽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인 사랑의 상태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그래서 이제 율법은 사방에서 우리를 포위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전인(whole man)과 관계됩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외적인 행위나 선의 겉치레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흔들며 말합니다. "오 남자여, 오 여자여, 오 소년과 소녀여, 너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표현합니다. 참된 죄의 확신의 핵심에 있는 이 사실을 제가 강조하겠습니다. 성령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벌거벗기실 때, 죄인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 때문에만 유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죄가 되지만—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의 존재' 때문에 더욱 유죄가 됩니다.

그는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core)에서부터 유죄입니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삶 전체를 포함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결코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결코 사랑할 수 없음을 반복해서 경험합니다.

우리는 "오 하나님,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이라는 거울 위에 쓰인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른 적이 없습니까? 여행 중에 식당이나 모텔의 화장실을 이용하다 보면, 가끔 거울에 쓰인 낙서들을 보며 그것을 쓴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생의 거울 속에 하나님의 필치로 쓰인 그 "사랑"이라는 한 단어를 보고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러분을 확신시킨 적이 있습니까? 율법의 신령함—율법의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치에서 여러분을 폐허의 더미처럼 남겨둔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거울을 보며, 어쩌면 말 그대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이렇게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내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내 마음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율법의 사랑 요구는 나를 속속들이 정죄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유죄이고, 정죄받아 마땅하며, 거절당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죄인이 다시 낙원(Paradise)으로 인도될 때,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결속을 깨뜨리고 지고하신 분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으며, 자신의 편에서는 그 관계를 회복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 죄인은 말하자면 자신의 사형 집행서에 스스로 서명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율법이 요구하는 그 사랑을 제 자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제가 구원을 얻으려면 그것은 반드시 저 자신이 아닌 '이방의 의(righteousness alien to myself)'에 의해서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획득하신 의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와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 사랑의 요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오 하나님, 내가 당신을 무엇보다 사랑하였고 나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였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의 목전에서 가납되려면 그분이 나의 자리를 대신하셔야만 합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위대한 계명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위대한 불순종, 즉 사랑의 결핍이라는 위대한 불순종을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그 위대한 긍휼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시며 "오 하늘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모든 일을 제가 다 이루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하셨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신인이셨기에 자신을 위해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으나, 불완전하고 죄 많은 죄인들의 자리에 서기 위해 완벽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오늘도, 바로 오늘도, 그분은 율법을 어김으로써 파멸에 이른 불쌍한 죄인들을 그분께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능동적 순종 안에서 율법 준수를 발견하고, 그분의 수동적 순종 안에서 그들이 율법을 어긴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발견하도록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되시면서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Justifier)이 되실 수 있습니다. 위대한 계명에 대한 위대한 불순종에 대하여,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위대한 긍휼이 있습니다.

시편 찬송 136편 1, 3절을 찬송한 후 이 내용의 적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시편 찬송 426편 3절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의로우시며, 그분의 은혜는 바다처럼 넓으시도다." 회중 여러분, 잠시 멈춰서 이 구절 하나를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복음 전체를 요약합니다.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분은 모든 죄악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는 모두 부패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바다처럼 넓은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하나님의 부요함(God's Riches At Christ's Expense)"이라고 바르게 정의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묻은 순종이라는 대가를 치른 그분의 은혜는 바다처럼 넓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위대한 죄인'들을 위한 '위대한 긍휼'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들을 겸손하게 만들며, 때로는 그들이 고백할 때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오,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할 수도 없는 위대한 죄인을 위해 넓은 은혜, 위대한 은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영혼이 머물러야(encamp) 할 두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에덴동산 곁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거기서 우리의 본래적 의와 우리가 한때 어떠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때 소유했던 그 순종과 영광의 험준한 고지가 어떠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때 하루 24시간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온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무엇보다 완벽하게 사랑했습니다. 영혼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기 전 완벽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높은 곳에서 너무나 깊이 떨어졌기에, 본성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율법이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우리의 온 존재가 하나님과 이웃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예언한 대로 이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무지가 되었고, 우리의 의는 불의가 되었으며, 우리의 거룩함은 사악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율법을 발로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들을 멸시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대적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낙원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회중 여러분, 만약 이것이 실제가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또 다른 동산인 겟세마네 동산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으실 때조차 완벽하게 순종하셔야 했습니다. 성부께서는 침묵으로 "안 된다, 내 아들아"라고 말씀하셨고, 성자께서는 그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성부 하나님과 성부의 뜻을 무엇보다 사랑하셨고, 그분의 백성을 자신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율법에 완벽하게 순종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이 에덴동산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의 숨은 곳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손은 죄를 향해 뻗었습니다. 그는 죄를 선택했습니다. 비록 그가 아름다움과 영광,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그는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발적으로 나오셔서 그분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그들이 그분을 묶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그분의 복된 손으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어둠 한가운데 동산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첫째 아담의 죄를 덮기 위해 둘째 아담으로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성찬(Lord's Supper)에서 아름답게 상징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주 낮게 임하셔서 마치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여기 내가 내 손을 들고 있다. 흉터가 보이지 않느냐? 여기 내가 너희를 위해 떡을 뗀다. 나의 찢긴 몸이 보이지 않느냐? 여기 내가 너희를 위해 포도주를 붓는다. 내가 흘린 피가 보이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다. 겟세마네뿐만 아니라 골고다에서도, 법을 어긴 자들, 언약을 어긴 자들인 너희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함이다!"

회중 여러분, 성찬은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거울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지만, 나는 나의 그 어떤 행위로도 고칠 방법이 없는 범법자입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의 완벽한 대속적 의에 있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신 그분 안에 있습니다."

여기 골고다 언덕에서 위대한 공의와 위대한 긍휼이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찬에서 상징적인 형태로 복제됩니다. (물론 본질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그분은 단 한 번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그분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나타내며 인 칩니다. 이처럼 성찬에서 위대한 공의와 위대한 은혜가 함께 만납니다. 성찬에서 의와 평강이 서로 만나고, 공의와 진리가 서로 입맞춥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고 싶습니까? 그러면 부어진 포도주와 떼어진 떡을 보십시오.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 보고 싶습니까? 떼어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를 보십시오. 성찬은 주님이 의로우시며 그분의 은혜가 바다처럼 넓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전시회입니다.

회중 여러분, 율법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가 적힌 거울이며 우리는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복음을 가지고 오셨고 그 복음 위에 "신적 사랑"이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그 거울은 영원히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칼빈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율법이라는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단장된 것을 볼 때 발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오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순전한 선물과 바다처럼 넓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흰 옷을 입은 우리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율법 앞에서 유죄이나 복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임마누엘 왕자를 보기를 갈망하며 그분 안에서 모든 소망을 찾는 곤고한 신자들은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계명에 순종할 수 없으나 위대한 긍휼에 안식하는 위대한 죄인들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시편 찬송 312: 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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