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앤더슨 #갈라디아서

설교 제목: 제2강 너희가 잘 달음질하더니 — 하나님이 네 삶에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자유 대 율법주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절 갈 5:7 —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본문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서론 (INTRODUCTORY MATERIAL)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주님으로부터 결코 듣고 싶지 않은 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잘 달리고 있구나(현재형)”이지, “너는 잘 달렸었지(과거형)”가 아닙니다. 과거형은 내가 마땅히 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내 삶에 일어났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책 전체의 핵심 구절로 사용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책 전체를 읽은 다음 그 구절을 중심으로 연구를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제 요절이 되었습니다.

모든 연구에는 “~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이 잘 달리고 있었습니다” 라는 제목이 붙을 것입니다. 지난주의 주제는 “득점도 없고, 안타도 없고, 커다란 실책뿐이다”였습니다.

지난주 마지막 두 구절에서 바울은 이 사람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 때문에 그들을 “저주를 받을지어다(Anathema)”, 즉 “심판과 멸망을 위해 따로 떼어 놓아질지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오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그 말씀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너희가 잘 달음질하더니 — 하나님이 네 삶에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오늘의 핵심 구절은 11절과 12절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더 파 사이드(Far Side)> 중 ‘노년의 슈퍼맨’이라는 제목의 만화가 있습니다. 늙어버린 강철의 사나이가 창가 난간에 서서 도약할 준비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근데 내가 어디로 가려던 참이었지?” (2010년 3월 9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밤은 기억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저 이야기가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 밤 이곳에 앉아 계신 여러분이 강해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중학교 수련회 때 하나님께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고백하며 불속에 던져 넣었던 그 헌신의 보따리를 기억하십시오. 빌리 그레이엄 전도 대회에서 내렸던 그 결단, 혹은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진정으로 모든 것을 맡겼던 그 시간을 기억하십시오.

그 시간들은 어떠합니까? 그 모든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사도 바울이 가진 가장 강력한 논거 중 하나가 오늘 여러분에게 제시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주의자 선생들에게 “복음이 내 삶에서 실제로 역사했기 때문에 나는 복음이 진리임을 안다” 라고 말하는 그의 개인적인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구절들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한 남자를 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난주 구절들을 읽으며 여러분은 바울이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이제 믿음을 저버리고 유대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화가 났고 걱정이 컸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연구를 시작하며 유진 피터슨의 기도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절대적인 독립을 주장하고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저의 교만임을 압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께도 아무것도 구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의로 저를 입혀 주소서. 아멘.” (A Year With Jesus, p. 313)

갈라디아서의 초기 두 장의 초점은 개인적입니다. 바울은 지난주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시작했거나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주셨고, 그는 사도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오늘 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조금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 연구에서는 그가 수행하는 사역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대전제를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잘 달음질하더니 — 하나님이 네 삶에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이 말을 기억하며, 우리는 ‘기억함’에 대해 잠시 대화하고 본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번 주 주일에 여러분은 무엇을 합니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remember me)” 고 하시지 않습니까? 10월 첫째 주 주일은 세계 성찬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떡을 떼고 잔을 마시며 여러분과 함께 기념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기억하다(remember)’라는 단어가 매우 결정적인 순간들에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폭풍을 겪고 배 밖으로 던져져 물고기에게 삼켜진 후에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탕자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뱃가죽이 등뼈에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핵심 문구가 나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came to his senses).” 즉, 생각하기 시작했고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 시점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누가복음 15:17)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물론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교회 안에서 무언가를 ‘기억’해낸다는 것이 조금 어색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현실과는 다른, 매우 성공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 안에서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며 행하신 그 선한 일들을 말하거나 공유하기를 주저한다면, 아마도 교만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부르시는 사실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요한계시록 3장 3절은 기억하는 일에 대해 주님이 주신 또 다른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구조를 아신다면 2장과 3장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며,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줄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바로 여러분의 변화된 삶 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여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추악했던 과거의 세세한 부분을 말하는 데 시간을 다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혀를 푸셔서 믿음의 여정을 말하게 하십시오. 다메섹 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되었는지, 다메섹과 시리아 사막에서 느꼈던 그 외로움, 그리고 예루살렘과 다소로 돌아갔을 때 가족들이 비웃으며 느꼈던 거절감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강력한 증인이 됩니다. 유대주의자 선생들은 변화된 삶 앞에서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갈 방향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게 합시다. 지난번에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Anathema).”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가졌던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본문 연구: 갈라디아서 1:10-24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단락의 시작 부분에 있는 모든 구절은 “~하기 때문에(For)”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유, 이유, 이유, 이유입니다. “For” —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는 즉시 두 가지 질문으로 그들을 압박합니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고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총애를 구하는가, 하나님의 총애를 구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중인가?”

그리고 저는 이 본문이 이어지는 방식을 사랑합니다. 그는 즉시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나팔을 불 때 이 책을 열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대목에 대해 루터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오늘날에도 평화와 안정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더라도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르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삶을 살았고 이제 그것을 말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는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지 선택을 했거나 선택하는 중입니다. “나는 이 땅에 남은 날들 동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 거리를 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진지하고 구체적인 헌신 없이 편안한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택입니다. 루터는 많은 사람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택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왜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대에서는 일편단심(single mind)이어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죠. 바울은 우리가 사역으로 부름받았을 때 내려야 할 선택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bondslave)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그는 경주를 마치고 싶어 합니다.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말인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가 성취하고 싶었던 목표였습니다.

  2. 그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종이 되려면, 그 길을 가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께 매인 종(bondslave)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많은 사람이 수많은 출처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요. 우리에겐 동료, 부모님(살아 계신다면), 그리고 설교를 멈추고 참견하기 시작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오는 수평적인 압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로 그것을 내 인생의 1순위로 삼고 싶어 합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삼고 있습니까?

제자들 모두가 천국에서 누가 국무장관이 될 것인지 다투던 다락방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수건과 대야를 들고 다른 이의 발을 씻겨줄 만큼 겸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 그 일을 기다리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그분은 자신이 3년 동안 훈련하고 인도하며 함께 살았던 이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직접 발을 씻기셨습니다.

겸손과 상한 심령 또한 선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증언함으로써 그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려 하는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웨스트(Wuest)는 무디 성경 학교의 헬라어 교수였습니다. 그는 40대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헬라어 신약 성경을 수많은 사역(paraphrase)으로 남겼습니다. 저는 그의 확장 사역본과 단어 연구를 보물처럼 여깁니다. “보라, 내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승인보다 사람들의 총애를 얻으려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내 일로 삼고 있는가? 만약 내가 여전히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면, 그런 경우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이다.”

바울은 이 의미를 여러분을 위해 확장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두 구절인 11절과 12절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문제에 대한 이번 연구의 핵심 구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다시 “For(왜냐하면)”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지난주에 그들에게 퍼부었던 말들에 비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께서 일단 열기를 조금 식히고 나면 다시 그 안에 있는 달콤함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여러분의 결혼 생활이나 인생이 정상적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화를 냈다가도 다시 부드럽고 다정해지는 것이죠.

그는 “형제들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매들”도 물론 포함됩니다. NET 성경(그리스어 학자들이 번역하고 6만 개 이상의 주석과 지도가 담긴 훌륭한 성경입니다)은 11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인간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율법과 은혜가 충돌하느냐 마느냐 하는 신학적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바꾸어 놓으셨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증언 을 사용하려 합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 선생들을 완전히 압도할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목격할 때 그들은 더 이상 반박할 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저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말씀을 읽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에 열정적이며,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로 대체되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간증입니까. 그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증명합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무엇?]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지난주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바울의 존재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그의 사도권도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해야 할 모든 내용, 즉 그의 메시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그는 이제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이 특수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에게 메시지를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직신학을 쓴 루이스 스페리 채퍼(Lewis Sperry Chaf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책이며,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았을 그런 책이다.” (p. 22)

이야기 자체의 기적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이제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습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모든 인간 종교처럼 행위 구원론으로 가득 찼을 것이며, 인간의 교만과 사탄의 속임수에서 탄생했을 것입니다.” (p. 1659)

이제 12절에서 그 복음이 어디서 왔는지 말해줍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다메섹 길에서의 경험 이후 배운 모든 것, 즉 주 예수님이 그에게 실제가 되셨고 성령의 감동으로 갈라디아서 본문을 기록하기까지 구세주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NET 성경은 12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NET에서 한글로 번역함)

“내가 그것을 어떤 인간적인 출처로부터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런 멋진 일을 하실 때가 참 좋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지휘 체계(chain of command)를 보십시오! 성부에게서 성자로, 천사에게서 종에게로, 그리고 요한에게로 이어집니다. 마침내 그는 주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습니다. 요한도 같은 경험을 했고 요한계시록은 그 열매입니다. 요약하자면 사도는 부정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하는 이 메시지는 사람을 따른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며,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의 존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그의 모든 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 삼각대의 세 번째 다리를 놓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변호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논거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바꾸시고 형제자매들과의 풍성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로 인도하신 여러분의 개인적인 간증 입니다. 여러분은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그런 기쁨과 기회를 누려왔습니다. 바울은 이제 유대주의자들에게 복음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알려주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정말 효과가 있는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정말 내 삶을 바꾸는가?” 그것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이 구절들에서 답할 질문입니다.

웨스트는 12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사람으로부터 직접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계시를 통해 받았습니다.” (p. 201)

한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난 신성한 사역의 증거는 관계를 통해 변화된 삶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이제 그의 간증이 시작됩니다. 다시 “For(왜냐하면)”라는 단어로 시작하죠?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여러분은 내가 교회를 대적하는 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눈을 감을 때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쓴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그렇다면 그 사실에 집중합시다! 우리가 그 관계를 가졌기에 누리는 승리와 기쁨과 축복에 집중합시다. 그것이 여러분이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빨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저 빛을 비추는 것, 즉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물을 때 여러분은 말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과거로 눈을 돌려 일어났던 일들을 들려줍니다.

저는 이 간증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압니다. 바울이 산헤드린에 앉아 있을 때 스데반이 창세기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너무 화가 나서 이를 갈았습니다. 그를 밖으로 끌고 가 돌무더기로 데려갔고, 사울의 발 앞에 옷을 벗어놓은 뒤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저는 돌에 맞는 끔찍한 장면 자체가 바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자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던 그 남자의 빛나는 얼굴이 그를 강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그 이야기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덧붙였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만큼 증오했던 그 장면은, 산헤드린 내부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아십니까? 때로는 어떤 일에 대해 깊은 유죄 판결(conviction)을 받게 되면, 오히려 극단적으로 나가서 더 날뛰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실패했을 때 술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취해버리거나, 작은 일을 저질렀을 때 아예 도를 넘어버리는 것이죠. 바울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8:1-3을 들어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는 증오로 미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당국으로 가서 묻습니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 명단이 있습니까?”

그는 명단을 확보했고, 이 새로운 봉기, 이 종교를 잔멸하고 멈추게 하기 위해 북쪽으로 130마일을 달려갑니다. 그래서 그에게 유대교에 있던 이전 날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증오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날들이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인용합니다.

“당신은 왜 특정한 환경을 겪고 있는지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그것은 당신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적인 뜻을 통해 당신의 삶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통해 일하시도록 허락해야 하며, 그분과 온전한 연합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당신의 생동감 넘치고 단순한 생명이 되어야 하며,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고 사셨던 그 방식이 당신 안에서도 일하고 사시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My Utmost For His Highest, 8/7)

그것이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14절에서도 여전히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blazing a pioneer path/개척자의 길을 가며)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저는 이 구절에서 바울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뜨거운 단어(hot words)’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이 단어들은 본문을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1. 박해함(Persecuting) —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다.”

  2. 잔멸함(Bringing destruction) — “내가 교회를 멸하려 하였다.”

  3. 길을 닦음(Blazing) — 이는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로를 찢으며 나아가는 것이죠. 모든 사람의 앞에 서는 것입니다. 1등이 되는 것입니다. 성과를 내고 다른 누구보다 앞서겠다는 강렬한 열정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달리기’에 비유하는지 이해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교회의 프로그램에 반대했고 “조상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전통’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십니까? 여기서 전통이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일원이 되었을 때 헌신했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덧붙여진 아주 세밀한 조항들이 전통이 되었고, 바울은 성경 본문뿐만 아니라 그 모든 부가적인 규칙들까지 철저히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종교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잤고, 종교를 먹었으며, 종교를 마셨습니다. 매일 열정적으로 종교를 살았습니다.

<론 서바이버(The Lone Survivor)>의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미 해군 네이비 실(SEAL)의 철학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조국은 내가 적들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하고 정신적으로 더 굳건하기를 기대한다. 쓰러진다면 나는 매번 다시 일어날 것이다. 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은 마지막 힘의 한 방울까지 쥐어짤 것이다... 나는 결코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p. 235)

물론 그 이야기는 그가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고, 여러 명의 목숨을 바쳐가며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5절입니다. 오,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오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은 이 위대한 대목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내면에서 따뜻한 감동(warm fuzzies)이 밀려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보십시오. 짧은 단어 “그러나(But)” 로 시작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배경에 있던 모든 나쁜 일들, 종교적이었던 과거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를 택정하신(set me apart) 이의 기쁨이 되었을 때” —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 주 예수님입니다 —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구절에서 세 가지 핵심 단어를 보십시오. 그리고 네 번째 단어는 16절에 나옵니다.

  1. 나를 택정하시고(set me apart)

  2.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시고(called me through His grace)

  3. 그렇게 하신 목적은 “그의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to reveal His Son in me)” —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최종 단어는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이제 여러분은 바울의 이전 삶의 방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도행전 9장에서 회심이 일어납니다. “그가 박해했던 것을 이제는 소중히 여기고, 증오했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며, 혐오했던 것을 이제는 숭배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이의 기쁨이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입니다. 이런 일을 똑같이 경험한 다른 사람이 또 있을까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느부갓네살과 바빌론 군대가 쳐들어와 도시를 완전히 불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역사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그 특별한 목적을 위해 택정(set apart)받았습니다.

자, 여러분이 잊지 않도록 이 네 가지 단어를 ‘C’로 시작하도록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문 기준)

  1. 택정됨(Chosen)

  2. 부르심(Called)

  3. 변화됨(Changed)

  4. 사명을 맡음(Charged)

이 방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는 이 네 가지 직면해야 합니다. 믿는 자로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주 오래전에, 혹은 아주 최근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셨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오늘 밤 영접한다면 그분은 그것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택정(Chosen)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언제 그분을 알게 되었는지 그분은 아십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부르심(Called)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 관계 안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회심의 시간입니다. 성령에 의해 바로잡고 바르게 행하도록 강권받는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은 여러분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Changed)시키기 시작하십니다. 그 변화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보게 될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특한 사역을 맡게(Charged) 됩니다.

이 부분이 가끔 무너지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영적 은사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어떤 열정을 가지고 계시는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고 싶어 하시는지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은 <크리스마스의 목적>이라는 좋은 책을 썼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노력해 볼 순 있겠지만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행실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누구냐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누구도 다 알 수 없을 만큼 크지만, 나는 당신이 그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p. 23)

만약 우리가 오늘 밤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여기 한 단어가 있습니다. 항복(Surrender) 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운영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항복하는 지점에 이르러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미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하십니까? 예를 들어 직장에 출근할 때 말이죠.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용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기 위해 제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존 오트버그는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The Me I Want to Be)》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할 때 보조석에 앉아 계시면 꽤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건강 문제가 생겼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어요. 상황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불안해요. 마음의 평안을 주세요.’

‘슬퍼요. 희망을 주세요.’

‘죽음이 두려워요. 제가 천국에 가는지 확인해 주세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운전대를 잡는 것은 확신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운전석에 앉으시면 더 이상 자신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운전하시면 더 이상 지갑의 주인도 자신이 아닙니다. 단순히 ‘내가 관대해지고 싶을 때 가끔 내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가질 권리가 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돈입니다.

예수님이 운전하시게 할 때, 나는 더 이상 내 자존심(ego)의 주인이 아닙니다.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채울 권리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 입의 주인도 아닙니다. 더 이상 험담하고, 아첨하고,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저주하고, 분노하고, 속이고, 위협하고, 조종하고, 과장하고, 얼버무릴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 입이 아니라 주님의 입입니다.” (p. 61)

“당신은 항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죄악되고 고집스러우며 목이 곧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립니다. 당신의 소망은 종종 이기적이며,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능력은 자기 기만에 가려져 눈이 멀었습니다. 당신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마음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당신은 항복해야 합니다.” (p. 63)

그리고 이렇게 힘든 말을 던진 후 그가 마무리하는 방식을 저는 좋아합니다.

“항복은 참 힘든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을 한 명 확실히 압니다. 바로 저(Me)입니다.” (p. 63)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주도권을 넘겨줄 때, 그것은 우리가 통제하는 데 익숙했던 무언가를 놓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이제 16절입니다. 여기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가 나옵니다. 15절의 그 모든 일(택정되고, 부름받고, 변화되는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위하여(In order that)” — 여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곧 혈육과 의논(consulted)하지 아니하고.”

그의 사역은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시나요?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보내진 유대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보내진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시 후에 약간의 조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미리 좀 읽어보았거든요.

여기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지금은 부르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 외에 다른 누구와 이야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이 변화시키고 계시는 분이며, 그분이 저에게 이 사역을 맡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를 통해 저는 변화되고 있지만, 또한 그분이 저에게 원하시는 일에 복종하고 순종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하므로 잠시 물러나 그분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아라비아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제 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에는 3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다메섹에서 약 50~75마일 정도 떨어진 곳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사막에 있는 팜스프링스 같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물러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말이죠. 바울은 그 어떤 인간과의 만남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유대교적 배경이 어떻게 이 새로운 사역 안에서 살아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는 왜 주님이 자신처럼 잘 훈련된 배경을 가진 사람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부르시는지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아라비아에서 얻어야 했고, 실제로 얻었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일정 기간 머물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왔고, 다메섹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는 곧장 회당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화가 나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은 밤에 성벽에 광주리를 내려 그를 탈출시켜야 했고, 그렇게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을 섬기는 데 따르는 대가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잠시 물러나 은둔의 시간을 가져야 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모세는 40년을 그래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선택했지만 하나님의 뜻 밖에서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며 40일 밤낮을 광야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쳐야 했기에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며, 그래야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도록 허락할 때 메시지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v.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머무는 동안

“그 후(Then)” — 18절 — 마치 여행 일지 같지 않나요?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15일)을 머무는 동안.”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와 함께 2주간의 은둔 시간을 가집니다. 그는 베드로를 “방문하려고(get acquainted)”, 즉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그곳에 2주 동안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전파자와 최고의 박해자가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제 같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유대주의자 선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는 변화입니다. 그는 율법주의자의 대명사인 베드로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나는 그 보자기 안의 부정한 것을 절대 먹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그 베드로 말이죠. 여러분은 같은 문장 안에 “주여”와 “그럴 수 없나이다(Not so)”를 결코 함께 쓸 수 없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갓 데뷔한 신참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 2주가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아마 잠잘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v.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어떤 표현이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까?

“우리 주(Our Lord)”입니다. 참 좋지 않나요? “주의 형제 야고보.”

여러분은 그를 언제 만났습니까? 유다서를 기억하시나요? 유다라는 이름이 세 명, 야고보라는 이름이 세 명 등장합니다.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두 명은 제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의 형제)입니다. 이들이 두 제자입니다.

다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이며, 여기서 언급된 인물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의 수장이었습니다. 바울이 찾아간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이거 아세요? 꽤 멋진 사실인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개인적으로 면담하신 단 두 사람이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뼈아픈 부인 사건을 다루어 다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함이었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유다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았었기에 이제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경험 덕분에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영광의 주!”라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사람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제 생각에 바울이 그들을 만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베드로,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 간 것은 모든 선교사가 그렇듯 기도의 후원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너무 기도를 많이 해서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기도 용사였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서 그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죠. 바울은 이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2주 동안 그곳에 머물며 만난 유일한 두 사람입니다.

v.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0절이 좋지 않나요? 마치 법정 증언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실만을, 온전한 진실만을, 진실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바로 그 장면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16)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말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아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하나님 면전에서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존 오트버그는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에서 거짓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한 고백: 누군가가 없을 때,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마크 트웨인은 금어기인데도 3주 동안 낚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유일한 승객에게 자신이 잡은 엄청난 양의 불법 어획물에 대해 자랑했습니다. 그 승객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트웨인이 마침내 그에게 누구냐고 묻자, 낯선 이는 자신이 주 정부의 수렵 감시관이라고 답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감시관이 물었습니다.

트웨인이 대답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미국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입니다.’” (p. 133)

v.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이 여기서 어디로 가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저는 바울의 이런 면을 사랑합니다. 그는 마치 “어디로 부름받았는지 상관없으니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선교사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힘든 도시이고 힘든 임무였습니다. 거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유대교의 중심지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은 바로 고향일 텐데, 그는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는 다소, 즉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고 있습니다. 약 120마일의 여정입니다. 그는 그곳으로 가서 사역을 합니다.

v.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그들 중 일부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v.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ravaging/잔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그가 교회와 관련하여 행했던 일을 설명하는 또 다른 ‘뜨거운 단어’가 여기 나옵니다. 원하신다면 아까 그 구절에 이 단어를 추가하셔도 좋습니다.

  1. 박해함(Persecuting)

  2. 잔멸함(Bringing destruction)

  3. 길을 개척함(Blazing a trail)

  4. 잔멸함(Ravaging) — 이 단어가 추가됩니다.

A. W. 토저는 말합니다.

“그 사이에 그는 영혼의 안식처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가 온유함 가운데 걸어갈 때, 하나님이 자신을 변호하시게 두는 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변호하려던 옛 투쟁은 끝났습니다. 그는 온유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The Best of A.W. Tozer, p. 31)

사도 바울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게리 토마스(Gary Thomas)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 날을 위해 42년을 기다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The Beautiful Fight, p. 123)

하나님의 영이 오늘 밤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정말로 진지해지기를, 정말로 나를 첫째로 두기를 이토록 오래 기다려왔단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24절: “나로 말미암아 [그들이 나에게서 발견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간증 속에서 발견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한 인간으로서 저에게서 발견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이 바울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그의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토저가 다시 말합니다.

“참된 신자는 아무런 유보 없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All in All)로 모십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어느 부분도 이 혁명적인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신 전체를 포함시킵니다.” (The Best of A. W. Tozer, p. 103)

스펄전(Spurgeon)은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지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에는 새로운 감각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새로운 눈,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새로운 귀가 있습니다. 신성한 진리를 붙잡는 새로운 손길이 있으며,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새로운 미각이 생깁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며, 새로운 관계와 특권을 부여합니다.” (Exploring the Mind & Heart of the Prince of Preachers, p. 46)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묵상집 <하나님을 가시화하기(Making God Visible)>의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200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방문 당시 저는 조안나라는 놀라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그곳에서는 ‘컬러드(colored)’라고 불리는 계층이었습니다.

... 조안나는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폭력적인 교도소, 즉 넬슨 만델라가 수년 동안 복역했던 교도소를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갱단원들이 교도소를 지배하고 있었고, 신입 단원이 되려면 바람직하지 않은 죄수를 폭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당국은 이 ‘짐승들’이 서로 때리고 죽이도록 방치했습니다.

이 매력적인 젊은 여성은 홀로 매일 교도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용서와 화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가져갔고, 만델라와 투투 주교가 국가 전체에서 이루려 했던 일을 작은 규모로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

케이프타운 해안가의 식당에서 조안나와 그녀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기자 정신을 발휘해 저는 그녀에게 교도소를 변화시킨 구체적인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추고 저를 바라보며 거의 생각도 거치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필립, 당연히 하나님은 이미 그 교도소에 계셨어요. 저는 단지 그분을 보이게(visible) 만들었을 뿐이에요.’” (p. 316)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그분을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10가지 교훈이 있으며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며 느끼는 이 즐거움을 여러분도 절반이라도 느끼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잘 달음질하더니 — 하나님이 네 삶에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분은 창세 전에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며, 변화시키고 계시고, 사명을 맡기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발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셔서 우리가 이 구절들을 공부하고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제2강: 연구 질문 (QUESTIONS)

  1. 갈라디아서 1:10-24을 읽고, 이 본문의 핵심 내용을 여러분의 언어로 요약해 보십시오.

  2. 10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누구를 기쁘게 하려 했습니까?

  3. 11절과 12절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어디서 얻었습니까?

  4.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5. 15절과 16절에 근거하여,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해 보십시오.

  6. 17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직후 무엇을 했습니까?

  7.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누구를 만났습니까?

  8. 24절에 따르면, 유대(Judea)의 교회들은 바울의 회심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9. 이번 연구의 구절 중 여러분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구절은 무엇입니까?

  10. 이번 연구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제2강의 교훈들:

이번 연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원문 or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