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빌

설교 제목: 당신은 어느 쪽이든 승리합니다


본문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지난주에 빌립보서 1장 19-26절을 읽고 연구하면서, 저는 계속해서 거버 해켓(Gerber Hackett) 형제님을 떠올렸습니다. 거버와 도나 부부는 약 27년 동안 우리 PBC 교회를 출석해 오셨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과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 두 분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거버 형제님은 현재 호스피스 간호사의 돌봄을 받으며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의 다정한 아내 도나가 곁을 지키고 있으며,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화요일 아침에는 한 장로님 부부가 심방을 갔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또 다른 장로님 부부가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그들의 소그룹 멤버 여러 명이 찾아와 해켓 부부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빌립보서의 이 구절을 형제님께 꼭 읽어드리고 싶어서 수요일에 심방을 갔습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다른 누군가가 또 방문했습니다. 이제 그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이 대목에서 거버 형제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게 바로 제 딜레마의 뿔(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지만 도나 메이를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아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제가 읽기를 마치자 거버 형제님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는 이러했습니다. “갈 준비도 되었고, 머물 준비도 되었네... 주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었네.” 그를 위해 기도한 후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내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네, 나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 내 보물과 소망은 모두 저 푸른 하늘 너머에 있네.

참으로,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거버 형제님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은 어느 쪽이든 승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동안에는 지금 이 순간 예수님과 함께하며 도나와 친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성경 말씀과 찬송이 그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본보기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도 갈 준비와 머물 준비를 모두 갖출 수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해 봅시다.

1. 기도의 능력을 활용하십시오 (빌 1:19상).

18절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보면, 바울이 여전히 기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상황이 전혀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것처럼, 그것은 그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보고, 복음을 자신의 목표로 삼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오직 그리스도의 메시지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함으로써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19절은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기뻐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에서는 기도를 복음의 선포 및 전파와 연결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에베소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담대히 복음의 비밀을 알리게” 해달라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에베소서 6:19).

2. 성령의 공급하심에 의지하십시오 (빌 1:19하).

바울은 중보기도를 활용했고, 그러자 성령께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도우심(help)”이라는 단어는 “필요한 모든 것의 충분한 공급”을 의미하며 너그러운 베풂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분은 인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그분의 공급을 아낌없이 부어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공급하심 덕분에 바울은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확신했습니다.

“구원(deliverance)”이라는 단어는 심각한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할 수도 있고, 구원(salvation)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바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단지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 쓴 내용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대부분의 주석가는 바울이 결국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여행한 후 다시 체포되어 순교했다고 믿습니다(디모데후서 4:16-17 참조).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이라는 구절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Septuagint)의 욥기 13장 16절을 정확히 인용한 것이라는 점이 제게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욥이 죽음에서 벗어나든 죽음을 통해서든 결국 구원받을 것을 알았던 것처럼, 바울 역시 자신이 어느 쪽이든 승리할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가 어떻게 공급하심으로 이어지는지 그 연관성을 놓치지 마십시오. 누군가 말했듯이, “이 땅에서의 기도는 하늘에서의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3.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시십시오 (빌 1:20-21).

궁극적으로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간절히 기대”한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아주 멋진 단어 그림입니다. 다른 모든 관심사에서 눈을 돌려 고개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지켜본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히 기대하다”라는 말은 트로이의 함락을 알리는 먼 곳의 봉화를 어둠 속에서 기대감을 품고 뚫어지게 바라보던 파수꾼에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www.precepts.org). 바울의 초점은 현재의 상황 너머 미래를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다가올 것을 위해 살고 있기에 그는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2장 28절에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저는 주님이 돌아오실 때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담대함(courage)”을 갈망합니다. 용기(담대함)란 두려움이 기도를 마친 상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기의 가장 좋은 본보기 중 하나이자 그것이 그리스도와 시간을 보내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사도행전 4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존귀하게 되다(exalt)”라는 단어는 헬라어 “메가스(megas)”로 “위대하게 하다, 확대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통해 그분을 더 크게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작게 만들고 있습니까? 시편 34편 3절은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든 죽음을 통해서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교사 댄 윌슨(Dan Wilson)은 토요일에 폰티악(Pontiac)에 와서, 아프리카에서 현지 지도자들을 훈련할 때 그들의 임무는 “예수님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습니다.

21절은 바울의 목적 선언문이며 우리 모두의 목적 선언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빌립보서 주석에서 이 구절을 “기독교의 심장을 향해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파고드는 텍스트”라고 부릅니다. 자, 지금 당장 이 구절을 함께 외워봅시다. 못 외울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여러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매우 짧지만 의미가 꽉 찬 구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함께 따라 해 봅시다. 이 성경 구절을 입으로 말하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넘어가기 전에, 여러분은 다음 문장을 정직하게 어떻게 완성하시겠습니까? 내게 사는 것은 ______이다.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흥분시킵니까? “이게 바로 인생이지”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 문장을 빈칸으로 남겨둘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누군가와의 관계입니까? 여러분의 직업입니까? 취미나 소유물일 수도 있습니까? 지난주 설교에서 레이 프리처드(Ray Pritchard)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소유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보통 한 가지 질문만 던집니다. “내 소유물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도 던져야 합니다. “내 소유물이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좋은 물건들이 당신을 소유할 때 당신은 위험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것이 여러분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유용한 제안들을 해주었습니다.

레이는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당신이 소유한 무언가가 당신을 소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영혼 깊은 곳에서 알게 되면, 그것을 줘버리십시오.”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서 주십시오.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그냥 줘버리십시오.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다시 노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원어 성경에서 이 구절은 글자 그대로 이렇게 읽힙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이 유익이라.” 삶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인격, 목적, 계획이 바울에게는 최우선입니다. 바울이 “내게”라고 말할 때, 그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삶이 무엇이든 간에, 내게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주석가 라이트풋(Lightfoot)은 사도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고 제안합니다. “나는 오직 그분을 섬기기 위해, 오직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 삽니다. 나는 그분과 떨어진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골로새서 3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이십니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에서 눈에 띄는(prominent) 분이십니까, 아니면 으뜸이신(preeminent) 분이십니까?

우리 대부분은 죽음을 유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개를 잃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생명의 부재가 곧 상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이 유익이 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1장 3-4절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유익(gain)”이라는 단어는 “이익”이나 돈의 이자를 의미합니다. 죽으면 오히려 남는 장사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입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사실 죽는다고 해서 정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영원을 보내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한 목사님은 우리가 더 나은 몸, 더 나은 집, 더 나은 기업, 그리고 더 나은 교제를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죽는 것은 유익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은 죽음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 묘사합니다.

  1. 우리는 필요 없는 모든 것 – 세상, 육신, 마귀를 잃습니다. 우리의 시련, 환난, 눈물, 두려움을 잃습니다.

  2. 우리는 중요한 모든 것 – 우리의 인격, 정체성, 우리의 열매는 유지합니다.

  3. 우리는 이전에는 결코 가져보지 못한 것 – 천국, 상급, 하나님의 임재,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를 얻습니다.

이번 주에 저는 서로 다른 삶의 철학을 보여주는 세 개의 묘비명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여기 레스터 무어(Lester Moore)가 잠들다; 44구경 총알 네 발을 맞고, 이제 레스(Les)는 더 이상(no more) 없다.

사실 레스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딘가에 여전히 더(more) 존재하고 있습니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다는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클로버 아래, 나무들 아래, 여기 조나단 피즈(Jonathon Pease, 피즈는 완두콩이라는 뜻의 peas와 발음이 같음)의 몸이 누워 있다. 피즈(완두콩)는 여기 없고 오직 꼬투리(몸)만 남았네, 피즈는 껍질을 까고 나와 하나님이 계신 본향으로 갔다네.

꽤 멋진 묘비명입니다. 인디애나주에는 이런 비문이 적힌 묘비가 있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는 낯선 이여, 잠시 멈추시오. 지금 당신의 모습이 한때 나의 모습이었고 지금 나의 모습이 곧 당신의 모습이 될 것이니, 죽음을 준비하고 나를 따르시오.

그 글을 읽은 어느 이름 모를 행인이 그 아래에 이렇게 답글을 긁어 놓았습니다.

당신을 따르려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소, 당신이 어느 길로 갔는지 알기 전까지는.

여러분은 죽으면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4. 죽음을 준비하십시오 (빌 1:22-23).

어느 전도자가 교회에서 설교하던 중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청중석의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지만, 앞쪽에 앉은 한 노인만은 예외였습니다. 전도자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어르신, 지금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가고 싶지. 하지만 당신이 질문하는 걸 보니 오늘 밤 출발할 버스 한 대 분량의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단지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우디 알렌(Woody Allen)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그저 그 일이 일어날 때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숙고하며, 만약 자신이 계속 산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임을 인식합니다.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그리고 나서 그는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말합니다. “끼었다(torn)”는 단어는 “군중 속에 있는 것처럼 압박을 받거나 강요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딜레마는 지연(머무름)과 떠남 사이의 갈등이지만, 그의 가장 깊은 소망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에 대해 많은 완곡어법을 사용합니다. 돌아가셨다, 떠났다, 세상을 떴다, 더 이상 여기 계시지 않다 등등이 있습니다. “떠난다(departed)”는 단어는 그 의미가 아주 풍부합니다. 사실 이 단어는 닻을 올린다는 뜻의 항해 메타포입니다. 신자가 죽을 때, 그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의 해안을 향해 출항합니다. 이 단어는 텐트를 걷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텐트 제작자였던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육신의 몸을 텐트에 비유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죽을 때 우리의 텐트는 무너지고 우리는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합니다. 처형을 앞두고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이는 “영혼 수면(soul sleep)”이나 연옥이라는 시험(유예)의 장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죽으면 즉시 그리스도의 임재 안으로 안내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장 8절도 같은 요점을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최상급을 표현한 것으로,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좋은” 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은”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신자들을 위한 놀라운 “사망 혜택(death benefits)”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점을 여는 젊은 사업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친구가 그랜드 오픈을 축하하며 꽃바구니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꽃집의 착오로 첨부된 카드에 “편히 잠드소서(Rest in peace)”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화가 나서 항의하는 친구에게 꽃집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오늘 어딘가에 묻힌 사람의 무덤 위에는 ‘새로운 곳에서 행운을 빕니다(Good luck in your new location)’라고 적힌 화환이 놓여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생을 떠날 때 새로운 곳(새로운 위치)으로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지 주소 변경에 불과합니다.

5. 진정으로 살 계획을 세우십시오 (빌 1:24-26).

우리는 오직 죽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진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떠날 준비가 가장 잘 된 사람만이 머물 준비가 가장 잘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우리가 된 모든 것(우리의 인격과 존재)을 가지고 갑니다. 라이먼 애벗(Lymann Abbot)이 80세가 되었을 때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 집, 내 친구들, 내 삶을 즐깁니다. 이것들과 헤어지는 것은 아쉽겠지요. 하지만 나는 항상 배의 선수에 서서 간절한 기대를 품고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바다로 나갈 때가 오면, 나는 미지의 항해가 나를 데려갈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간절한 관심과 기쁜 소망을 품고 선수에 서서 앞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출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기꺼이 기다리려 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참고로, 자살을 고민해 본 적이 있거나 그저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이 구절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이곳에 남아 구주를 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죽음의 시간은 주님의 부르심이지,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 다른 누구의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결코 인생의 최악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최선에 대한 개선이다...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종종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 수 없는 두 가지 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것들은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알 수 없는 두 가지 엄청난 축복으로 보입니다.”

“인생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인생보다 오래 남을 무언가에 투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헨리 제임스(Henry James)였습니다. 바울은 천국에 가기를 원한 만큼이나,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소망이 그들의 영적 필요에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왜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이곳에 있습니까? 우리가 신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왜 우리를 바로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셨을까요? 우리에게 맡기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어서 천국에 갈 텐데, 왜 이곳에 있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진보”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향한 여정을 돕고 싶었습니다 – 이 기쁨(rejoicing)이라는 반복되는 주제가 이 두 구절에서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가 죽으면 그에게 유익입니다. 그가 머물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입니다. 그는 어느 쪽이든 승리합니다.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을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저세상에 대해 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에서 이토록 무능해진 것이다. 천국을 겨냥하면 이 땅도 덤으로 얻게 된다. 이 땅을 겨냥하면 둘 다 잃게 된다.” 아프리카의 개척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승리를 축하할 영원이 주어지겠지만, 그 승리를 얻기 위해 해가 지기 전까지 단 한 시간의 짧은 시간만이 주어져 있다.”

라이프 어플리케이션(Life Application) 빌립보서 주석에 있는 이 인용문이 상황을 잘 설명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삶을 꽉 움켜쥡니다. 잃어버리거나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여,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필멸성(죽을 운명)의 노예가 됩니다. 대조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영생으로 가는 문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떤 대의에 대한 목적과 의미, 헌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41페이지).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천국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섬기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1500년대 존 후퍼(John Hooper) 주교가 순교하기 전, 그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던 친구가 그에게 신앙을 철회하라고 간곡히 권하며 “삶은 달콤하고 죽음은 쓴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후퍼는 대답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더 달콤하고, 영원한 죽음은 더 쓴 법이라네.”

거버 형제님이 제게 불러주신,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네(This World is Not My Home)>라는 찬양의 가사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 오 주님, 내겐 주님 같은 친구가 없네. 천국이 내 집이 아니라면, 오 주님, 나는 어찌할꼬? 천사들이 열린 천국 문에서 나를 부르니,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이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네.

저 영광의 땅에는 죽음이 없네, 성도들이 승리를 외치며 곳곳에서 찬양하네, 먼저 간 이들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오니,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이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네.

그들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아네, 나는 오래전 예수님과 그 약속을 굳게 맺었다네. 내가 비록 약하고 가난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인도하실 줄 아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이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네.

예수님과 그 약속을 굳게 맺으셨습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기도를 따라 하십시오.

“주 예수님, 너무 오랫동안 저는 제 삶에서 당신을 배제해 왔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당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며 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제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바꿈으로써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저는 당신이 부활하신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영접합니다. 주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 마음을 다해 고백합니다. 내 죄를 짊어지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를 원합니다. 이제 믿음으로 제 삶에 들어오시기를 구하오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게 하옵소서. 아멘.”


원문 or 출처

https://www.preceptaustin.org/philippians_17-8#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