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소개: 찰스 해돈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찰스 해돈 스펄전(1834–1892) 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침례교 목회자로, 교회사에서 "설교의 황태자(Prince of Preachers)" 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중 한 명입니다.
1. 생애 및 신학적 배경
1. 주요 사역 및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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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20세의 젊은 나이에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이후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6,000석의 예배당을 매주 가득 채우며 영적 대각성을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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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 사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여 900명 이상의 목회자를 배출했으며, 고아원 사역 등 사회 복지에도 헌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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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사역: 그의 설교는 매주 인쇄되어 전 세계로 팔려 나갔으며, 현재까지도 단일 설교자로서 가장 많은 분량의 저술(3,500편 이상의 설교문)을 남긴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설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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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적 강해: "어떤 본문에서 시작하든 나는 곧장 그리스도께로 달려간다"라는 그의 말처럼,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은혜를 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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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함과 위트: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때로는 날카로운 풍자와 위트를 섞어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강력한 전달력을 구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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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의지: 유려한 수사학보다 성령의 즉각적인 인도하심을 신뢰했으며, 설교단에 오를 때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2. 신학적 성향 및 사역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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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침례교: 칼빈주의적 신학 전통과 침례교의 신앙 고백을 조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전도적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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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그레이드 논쟁(Downgrade Controversy): 생애 말기, 교단 내에 침투한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 비평학에 맞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보수적 신앙의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3. 대표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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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보물창고』(The Treasury of David): 시편 전 권에 대한 방대한 강해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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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들을 향한 권면』(Lectures to My Students):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위한 실천적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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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앤 이브닝』(Morning and Evening):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일일 묵상집.
4. 번역된 설교 목록
- 창32 (스펄전) 29절 그가 거기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느니라
- 창32 (스펄전) 28절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권세
- 창33 (스펄전) 11절 내게 넉넉하니
- 18550114 왕하7 (스펄전) 19절 불신앙의 죄 (THE SIN OF UNBELIEF)
- 시1 (스펄전) 다윗의 보고(The Treasury of David)
- 시2 (스펄전) 다윗의 보고(The Treasury of David)
- 시3 (스펄전) 다윗의 보고(The Treasury of David)
- 18550117 말3 (스펄전) 6절 하나님의 불변성
- 18550117 고전11 (스펄전) 24절
- 갈1 (스펄전) 16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
- 갈5 (스펄전) 6절 루터 기념 설교
- 갈5 (스펄전) 6절 할례와 무할례
- 빌3 (스펄전) 8절 값진 보화 (그리스도를 얻는 것)
- 창19 (스펄전) 15절 서두르는 롯
5. 우리의 초기 7년 (Sword and Trowel Magazine, 1876년 4월호)
아카이브 주인장의 덧
갓 스무살이 된 스펄전이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에서 설교하고 7년에 대한 회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사역 이야기를 직접 써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의 펜에 맡겨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지면을 자서전으로 바꿀 수도 없으며,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에 대해 써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가감 없는 사실들과 타인들이 남긴 비평의 발췌문들만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853년 12월의 마지막 주일 중 하루, 당시 19세였던 C. H. 스펄전은 케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Waterbeach)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떠나 런던의 강단을 채워달라는, 자신도 매우 놀랐던 초청에 응하여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New Park Street Chapel)에서 설교했습니다. 회중은 그저 한 줌도 되지 않았습니다. 설교자에게 그 예배당은 너무나 크고 어둡게 느껴졌으나, 그는 주님을 의지하며 야고보서 1장 17절 본문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첫날 저녁부터 변화가 나타났고 예배당은 더 활기차 보였습니다. 그날 저녁의 본문은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허물이 없느니라” (계 14:5 참조)였습니다.
간곡한 요청에 응하여 C. H. 스펄전은 1854년 1월의 첫째, 셋째, 다섯째 주일에 런던에서 설교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주일이 오기도 전인 1월 25일, 그는 6개월의 수습 기간 동안 강단을 맡아달라는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이 초청에 대한 답장은 파이크(Mr. Pike) 씨의 저서 『서더크 비국교도의 스케치(Sketches of Nonconformity in Southwark)』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개월의 수습 기간은 결코 다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은 가득 차기 시작했고, 기도회는 권능으로 충만했으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4월 12일, 50명의 남성 성도들이 서명한 특별 회의 요청서가 집사들에게 제출되었습니다. 교회 기록부에 따르면, 4월 19일 다음과 같은 결의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제 C. H. 스펄전 목사에게 즉시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줄 것을 가장 진심 어린 애정으로 초청하며, 그의 사역의 결과가 성령의 부어주심과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종교적 부흥을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인들의 회심과 믿는 자들의 덕을 세우는 일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1854년 4월 28일 도버 로드 75번지에서 발송된 편지를 통해 수락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편지 또한 우리 출판사에서 구할 수 있는 파이크 씨의 책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회중은 급격히 불어났고, 저녁에 가스등을 켰을 때는 마치 ‘캘커타의 흑굴(Black-hole of Calcutta, 극도로 좁고 더운 감옥)’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1854년 어느 저녁, 설교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듯이, 믿음으로 저 뒤쪽 벽도 무너질 것입니다!” 한 연로하고 신중한 집사가 다소 위압적인 말투로 설교가 끝난 뒤 그에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듣지 않게 해주시오.” 설교자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벽이 무너지고 나면 더 이상 그 말을 들으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의가 열렸고 기금이 마련되었습니다. 적절한 절차에 따라 부속실과 학교 건물이 예배당 안으로 확장되었고, 예배당 측면을 따라 새로운 학교 교실이 세워졌습니다. 창문을 내리면 교실에 앉은 사람들도 설교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인 1855년 2월 11일부터 같은 해 5월 27일까지는 엑서터 홀(Exeter Hall)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시기에 신문들에는 엑서터 홀에서 한 청년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스트랜드(Strand)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저널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비평들이 실렸으나, 이는 오히려 군중을 더 불러모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유황과 당밀(Brimstone and Treacle)’ 같은 캐리커처가 인쇄소 창문을 장식했고, 가장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유포되었으며, 가장 잔인한 거짓말들이 지어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위대하신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청중의 회심을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셨고, 우리가 머무는 내내 엑서터 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은 비록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다를 찻주전자 속에 집어넣으려는 시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을 돌려보내는 것은 예외 없는 일상이 되었고, 입장에 성공한 이들도 상황은 그리 낫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밀집도와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저렴한 팸플릿과 신문 기고문을 통해 우리의 이름을 점점 더 널리 알렸고, 이는 모두 군중을 불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더 많은 캐리커처가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산 채로 잡아라-오!(Catch-’em-alive-O!)’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1856년 6월, 우리는 다시 엑서터 홀로 돌아가 저녁 설교를 그곳에서 하고, 오전 예배는 본래 예배당에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편하다고 느껴져 8월에는 더 큰 예배 처소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엑서터 홀 소유주들은 한 회중에게 홀을 지속적으로 대여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고, 우리는 다른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마침 아주 적절하게도, 쥘리앵(M. Jullien) 씨의 거대 콘서트를 위해 로열 서리 가든스(Royal Surrey Gardens)의 대강당이 갓 완공되었습니다. 사업의 규모가 너무 커서 다소 떨리는 마음도 있었으나, 주일 저녁 예배를 위해 이 홀을 확보했습니다.
교회 기록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856년 10월 19일 주일. 이날 저녁, 10월 6일 교회 회의에서 통과된 결의안에 따라 교회와 회중은 로열 서리 가든스의 뮤직 홀에 우리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집결했다. 약 7,000명의 매우 많은 인파가 모였고, 예배는 평소처럼 찬송과 성경 봉독, 기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목사님이 기도를 시작한 직후, (공모한 악의적인 자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란이 일어났고 회중 전체가 갑작스러운 공포(panic)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출입구, 특히 갤러리 층에서 무서운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몇몇 사람들이 성급하게 서두르거나 뒤에서 밀려드는 군중의 압력 때문에 북서쪽 계단의 돌계단에서 넘어졌고, 밀려드는 인파에 짓밟혔다. 이 비극적인 결과로 7명이 목숨을 잃었고, 28명이 심한 타박상과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목사님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단에 머물며 사람들의 공포를 완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예배를 재개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흥분하여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예배는 종료되었고, 남은 이들은 조용히 흩어졌다. 이 비통한 사건은 목사님의 신경계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며칠간 완전히 탈진하여 모든 설교 일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크신 자비로 그는 회복되어 10월 31일 주일, 본래의 예배당 강단에 설 수 있었으며 점차 평소의 건강과 활력을 되찾았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교회는 이 사건을 회의록에 남기고, 이 슬픈 재난 속에서도 사랑하는 목사님과 집사들, 그리고 성도들의 생명이 보존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경건한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또한 하늘 아버지께서 이 겉으로 보이는 악으로부터 가장 크고 지속적인 선을 이끌어내 주시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이 큰 고난을 바라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의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더해, 대중 언론의 사악한 비난까지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한 유명 신문이 남긴 사례 하나만을 제시하겠습니다(이름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 무지했던 시절에 그 신문은 이렇게 썼습니다. “스펄전 씨는 죄 많은 청중의 머리 위에 저주를 퍼붓는 설교자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교훈을 얻어 친절한 말과 온화한 훈계로 길 잃은 영혼을 바른길로 인도하려 하지만, 스펄전 씨는 그들의 코를 꿰어 종교 안으로 협박해 밀어 넣으려 한다. 스펄전 같은 자들의 침범과 신성모독에 장벽을 세워 ‘여기까지만 오고 더는 오지 말라’고 말하자. 현재 계몽이 필요한 수만 명의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고안하자. 이 사람은 스스로 의로운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보기에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기꾼(ranting charlatan)에 불과하다. 우리는 편협하지도 않고 안식일을 엄격히 따지는 감성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극장과 교회는 엄격히, 아주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손에 채찍을 쥐여주어, 지난 일요일 밤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과 부상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보다 더 크게 서리 가든스 뮤직 홀의 스펄전 입에서 울려 퍼졌던 저 비열한 신성모독자들을 사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본다.”
가난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이 마련되었고, 추가적인 공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설교자는 대규모 회중에게 가장 불리한 시간대인 오전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몰려왔고, 3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참석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뮤직 홀에 참석했던 귀족들의 명단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참석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 명단을 싣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기쁨은, 주님을 찾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시기, ‘하비탄스 인 시코(Habitans in Sicco, ‘마른 땅의 거주자’라는 뜻의 필명)’가 서명하고 웨스트민스터 브로드 필랙터리에서 발송된 유명한 편지 한 통이 『타임스(The Times)』지에 실렸습니다. 저명한 학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이 글은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싶소. 같이 갑시다.” 나는 이른바 고교회파(High Churchman) 신봉자로 여겨지는 사람이라 이렇게 대답했소. “뭐라고요! 칼빈주의자, 그것도 침례교도의 설교를 들으러 가자고요? 교회 근처에 있으면서도 정작 울타리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의 말을 말이오?” “상관없으니 와서 직접 들어보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어제 아침 서리 가든스의 뮤직 홀에 갔소. ... 10,000명의 영혼으로 구성된 회중이 홀로 쏟아져 들어와 갤러리로 올라가고, 웅성거리고 소란을 피우며 몰려드는—마치 거대한 꿀벌 떼와 같은—모습을 상상해 보시오. 그들은 처음에는 명당을 차지하려 애쓰더니 나중에는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앉으려 했소. 30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자리를 잡으려면 적어도 그 정도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하오—스펄전 씨가 그의 강단에 올랐소.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서두름, 발소리가 지나간 뒤, 즉시 전기 신호처럼 참석한 모든 이의 가슴을 관통하는 낮고 집중된 경건의 전율과 속삭임이 이어졌소. 이 자석 같은 사슬에 묶여 설교자는 우리를 약 2시간 동안 꼼짝 못 하게 붙잡아 두었소. 그의 강론을 요약하는 것이 내 목적은 아니오. 다만 그의 목소리에 대해 말하자면 그 권능과 음량이 저 거대한 회중석 구석구석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했다는 것, 그의 언어는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비속하지도 않았다는 것, 그의 스타일은 때로는 친근하고 때로는 웅변적이지만 언제나 적절하고 종종 품격 있었다는 것만 말해두겠소. 그의 교리에 대해서는, 스펄전 씨가 무종교, 위선, 가식, 교만,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쉽게 얽어매는 은밀한 가슴 속 죄들에 대항하여 복음의 무기를 들고 가차 없는 적개심으로 싸우는 그 전쟁의 최전선에 칼빈주의나 침례교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사람 자체가 당신에게 자신의 진실함에 대한 완벽한 확신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오.
내가 저 —— 대주교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적 양식의 부족을 겪었던 내 아이들의 이야기와 서리 가든스에서 내가 누렸던 만찬에 대해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이 두 이야기로부터 실질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교훈을 주고 싶기 때문이오. 여기 국교회의 많은 현직 목사보다 더 칼빈주의적이지도 않으면서, 옛 라티머(Latimer)가 말했듯 예문과 본문 위에서 “굽신거리고 중얼거리는(humbles and mumbles)” 자가 아닌 한 사람이 있소. 여기 성인의 침례에는 전신 침례나 그와 유사한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한 사람이 있소. 이것들이 그의 교리적 결점일지 모르나, 만약 내가 —— 대주교의 시험 담당 사목(examining chaplain)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오. “각하, 여기 웅변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큰 교회를 자신의 목소리로 채울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하, 여기 대도시에 성 파울로 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두 교회가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이 10,000명의 영혼을 끌어모으는 이단적인 칼빈주의자이자 침례교도인 스펄전 씨를 초청하여, 어느 주일 아침 그 교회들 중 하나의 본당(nave)에서 그의 목소리를 한 번 시험해 보게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새 성전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은 계속되었습니다. 1858년 1월에 확보된 현금은 6,100파운드였고, 1859년 1월에는 9,639파운드가 모였는데 그중 5,000파운드는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and Castle)’ 근처의 부지 대금을 치르기 위해 따로 떼어 두었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나아갔습니다. 목사 자신이 직접 방문하거나 설교를 통해 많은 기금을 모았고, 이를 위해 원근 각처를 여행했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친구들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초석을 놓은 뒤인 1860년 1월에는 16,868파운드가 수중에 들어왔는데, 이는 소요 예산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덕분에 토지 대금이 완납되었고 건축업자에게 기성금을 제때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Metropolitan Tabernacle)의 정초석은 1859년 8월 16일 모턴 페토 경(Sir Morton Peto)에 의해 큰 기쁨 속에 놓였습니다. 전체 과정에 대한 보고서는 우리 출판사에서 구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그러나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스파이서(Mr. Spicer) 씨와 다른 친구들을 ‘어상 조합(Fishmongers’ Company, 당시 부지 소유주)’의 이사회에 배치하신 특별한 섭리와, 그 회사가 부지를 영구 보유권(freehold)으로 매각할 수 있게 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매리 크레이의 고(故) 윌리엄 조인슨(William Joynson) 씨는 만약 회사에 법적 매각 권한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국회 통과를 위한 법안 비용을 예치해 주기도 했습니다. 더욱 놀랍고 행복했던 일은, 목사의 설교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브리스틀의 한 신사가 건축 기금으로 무려 5,000파운드를 기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업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모든 관대한 마음과 자기희생적인 헌신은 오직 영원 속에서나 다 밝혀질 것입니다. 당시 우리에게 이 사업은 너무나 거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완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자비 중 하나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윌리엄 힉스(William Higgs)가 건축업자로서 전 과정을 통틀어 무한한 관대함으로 우리를 대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현재 우리 교회의 귀한 집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1859년 12월, 우리는 서리 뮤직 홀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오전 예배 사용료로 회사 측에 거액을 지불했는데, 이것이 그 회사가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일 저녁에 가든을 유흥을 위해 개방하겠다고 제안했고, 우리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 덕분에 한동안은 그 악행을 막을 수 있었으나, 결국 저속한 부류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주일의 ‘쾌락’이 수익성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주일에 가든을 개방하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실제로 떠났습니다. 얼마 후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거의 소실되었고, 남은 잔해는 수년간 병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59년 12월 18일, 우리는 엑서터 홀에서의 세 번째이자 가장 긴 체류를 시작했고 이는 1861년 3월 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곳을 떠나며 남긴 우리의 소회를 여기에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자주 유랑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벽 안에서의 세 번째 체류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시기와 계절마다 이동해야 할 강제성을 가졌습니다. 때로는 양심의 강요였고, 이번처럼 때로는 타인의 유흥에 의한 강요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처음 서리 뮤직 홀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셨음을 확신합니다. 사탄도 따라왔으나 그는 우리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저 무시무시한 재난의 기억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특별 집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가장 놀라운 수단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공포스러운 대참사였을지라도, 그것이 수많은 축복의 어머니가 되었음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기독교 세계는 그 사례를 주목했고 그 이후의 성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를 따랐고, 오늘날 극장과 성당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전에는 결코 선포되지 않았던 곳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의 이동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이곳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웨스트엔드(West End)에 거주하며 아마도 강 건너편까지는 오지 않았을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말씀을 들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완악한 마음을 깨뜨렸습니다. 여기서 영혼들이 새로워졌고 방황하는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여호와께 드리고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지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집으로 여정을 떠납니다. 오늘 나는 모세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1861년 1월 6일 자 기록부에는 목사와 주요 일꾼들이 서명한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선언문이 적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새로운 태버너클을 부채 없이 봉헌하기 위해 4,000파운드 이상의 자금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 세속적인 자비를 겸손히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기도가 응답되고 이 은총이 베풀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이를 증언합니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같은 해 5월 6일, 목사와 많은 친구가 다음과 같은 문구의 또 다른 증언록에 이름을 서명했음을 주목해 주십시오. “최근까지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에서 예배드렸으나 이제 뉴잉턴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에 모인 우리 아래 서명인들은, 넘치는 마음으로 우리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리고 기록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하였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초과하여 채워주셨습니다. 전체 금액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채워졌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선하시며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분을 의심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우리 교회와 개개인이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여 평온함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사실에 우리의 인을 칩니다.”
약 한 달간의 봉헌 집회(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우리 출판사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를 마친 후, 우리는 1861년 5월 태버너클에서 정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건물 전체는 부채가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회계 장부상 31,332파운드 4실링 10펜스가 수입되었고 정확히 동일한 금액이 지출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출처: C. H. Spurgeon, The New Park Street Pulpit Sermons, vol. 1 (London: Passmore & Alabaster, 1855), xiv–xx쪽.